수동적인 여성상에서 주체적인 여성상으
남의 눈 신경 쓰지 말고, '생리'도 당당히 말해

’그날’이 아닌 ‘생리’를 말한 생리대 광고. 광고에서 ‘생리’를 말한 것은 이 광고가 처음이었다.

1971년 국내에 처음 일회용 생리대가 출시된 이래 ‘그날’, ‘마법’ 등으로 통용됐던 ‘생리’는 47년 만인 지난해 처음 광고에서 제 이름을 찾았다. 기존 생리대 광고 속 여성들이 흰옷을 입고 정갈함을 강조했다면, 이 광고의 여성들은 "그날? 그날이 도대체 뭔데? 아프고 신경질 나. 뭘 입어도 불안해. 절대 상쾌하지 않아…그게 생리야"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늘 등장하던 파란 액체도 피를 닮은 빨간 액체로 바뀌었다. 대학생 김소희 씨는 "생리가 ‘볼드모트(소설 ‘해리포터’ 속 이름을 불러선 안 되는 악당)’도 아니고, 제대로 말하니 속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11년 전 오늘,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은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시위를 벌였고, 1975년 UN이 이날을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국제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렇게 자유와 평등을 갈망했던 여성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광고를 보면 답이 보인다. 요즘 광고에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우리 사회의 화두로 부상한 페미니즘과 젠더 감수성(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하는 감수성)을 수용한 움직임으로, 불과 1~2년 사이의 변화다.

◇ 고정관념 탈피한 주체적인 여성상 등장

스포츠 의류 브랜드 나이키가 지난 1월 유튜브에 공개한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광고는 한 달 만에 조회 수 1000만 회를 넘어섰다. 분홍 한복을 입고 돌상에 앉은 여자아이가 가수 엠버, 골프 선수 박성현 등을 보고 돌잡이로 축구공을 선택하는 스토리다. 특히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처럼 보인 여성이 실은 태권도용 마우스피스를 소독 중이었다는 반전 장면이 화제를 모았다.

나이키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중.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처럼 보였던 여성은 사실 마우스피스를 소독 중이었다.

이어 나이키는 ‘미친 여자’들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지난달 24일 공개된 글로벌 광고 ‘드림 크레이지어(Dream Crazier)’는 편견과 고정관념에 싸우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던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광고는 미국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의 목소리를 빌어 "여자가 히잡을 쓰고 경쟁하고, 연속 1090 회전을 성공하고, 그랜드 슬램 23번 달성 후 출산을 하고 복귀하니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너한테 미쳤다고 하면, 그 미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줘"라고 말한다. 어차피 미친 짓일 테니, 그냥 하라(Just do it)고.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광고가 공개된 지 10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700만 회를 넘어섰다.

여성의 몸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바비인형같이 날씬한 여성이 등장했던 속옷 광고에는 밋밋한 가슴과 뱃살을 드러낸 평범한 여성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슴 크기를 표현하는 ‘뽕’, ‘볼륨’, ‘푸쉬업’ 같은 용어도 자취를 감췄다. 교복업체 스쿨룩스는 바지와 반바지 교복을 입은 여고생 화보를 내놨다. 이 업체는 불과 4년 전만 해도 "날씬함으로 한판 붙자"며 ‘코르셋 재킷’과 ‘쉐딩 스커트’를 선보였다. 회사 관계자는 "학생들이 무더운 여름에도 쾌적하고 편하게 교복을 입을 수 있도록 폭넓은 하복 스타일을 제안했다"라고 밝혔다.

날씬한 미니스커트 교복 대신 티셔츠와 반바지 교복을 입은 스쿨룩스의 교복 화보.

◇ 그날이 뭔데? ‘생리’ 말하는 광고

광고 속 여성들이 달라진 이유는 최근 소비시장의 주역인 밀레니얼과 Z세대의 성 역할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자는 어때야 하고, 남자는 어때야 한다는 이분법적 통념에서 벗어나, 그저 한 인간으로서 ‘나’에 집중한다. 성별의 경계 없는 젠더리스 옷을 입고, 화장도 남녀 구분 없이 필요하면 한다.

문화계도 고정관념을 탈피한 새로운 여성상이 주목받는다. 영화 ‘주먹왕 랄프2’에는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디즈니 공주들이 등장했고, 최근 개봉한 영화 ‘캡틴마블’에선 마블 시리즈 최초로 여성 영웅이 단독 주인공으로 나왔다.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 시장도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파란 액체 대신 빨간 액체가 등장한 생리대 광고.

고정된 성 역할을 탈피하자는 움직임은 페미니즘 운동으로 해석돼 성별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나이키 광고는 유튜브에서 1000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지만, ‘좋아요(1만3 천명)’보다 ‘싫어요(1만6천 명)’ 수가 훨씬 많다. 댓글 게시판도 논쟁이 오간다. "여성의 도전적인 모습이 좋았다",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는 평부터, "여성 고객을 잡으려고 만든 상술"이라는 혹평까지 다양하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젠더 감수성은 남녀의 대결이 아니라, 우리가 가졌던 관성을 버리는 것"이라며 "이는 단기적인 이슈가 아니라, 패러다임을 넘어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