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이 할머니 같네요. 연보라색 니트랑 살구색 발목 스타킹, 굽 없는 컴포트 슈즈는 앞으로 '절대' 금지입니다."
'픽업 아티스트' 강사는 쉴 새 없이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일어나 보세요, 허리 좀 펴보시고요. 손톱 색깔이 형광 핑크네요? 그 롱패딩은 평소에도 입는 건가요? 설마 남자 만날 때 그 배낭 메고 가는 건 아니죠! 기자가 쭈뼛거리는 사이 그는 '견적'을 내고 문제점을 짚었다.
픽업 아티스트. 이 단어의 유래는 198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한 영화 '환상의 발라드(The Pick-up Artist)' 에서는 아예 제목으로 등장했다. 주로 불특정 다수 여성에게 접근해 잠자리를 목적으로 작업하는 '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길거리 헌팅이 유행하던 2010년대 초반에는 '작업' 거는 남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인터넷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성별이 역전됐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 픽업 아티스트들이 활약하는 시대다. 이들은 불특정 다수 이성에게 잠자리를 목적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찍은 이성'을 내 것으로 만드는 궁극의 연애 기술을 가르친다. 일종의 '매력 PT(퍼스널 트레이닝)'인 셈. 아예 여성을 상대로 한 전문 학원도 등장했다. 기자가 직접 체험해 보기로 했다.
지난 25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여성 픽업 아티스트' 전문 학원을 찾았다. 4층짜리 건물 2층, 공유 오피스 한쪽에 있는 작은 사무실. 잠긴 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기다리니 20대 후반의 긴 머리에 날씬한 여성이 문을 열어준다. "얼마나 절박하셨으면 수업도 없는 시간에 직접 학원까지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상담은 시작되었다.
저희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수강생들은 대개 학원의 온라인 카페 공지를 보고 찾아온다. 회원 수 1만 5000명 규모의 비공개 카페에서 강사들은 칼럼을 쓰고, 수강생들은 후기를 올린다. 1200명 규모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를 통해 실시간으로 질문을 주고받기도 한다.
픽업 강좌는 네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1대1 매력 과외, 다음 단계는 연애 컨설팅(일명 '연애조작단'), 대개는 이 둘이 종합적으로 진행된다. 궁극의 단계는 '대중 유혹'. 번외로 성 지식을 가르치는 단계도 있다.
1대1 과외는 3~4명의 트레이너가 담당한다. 수강생의 성향과 배경에 따라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강사가 배정된다. 자존감을 담당하는 강사, 여성성을 강조하는 강사, 연애 전략을 맡고 있는 강사 등 강사별로 강점이 다르다. 강사들은 주기적으로 카페에 칼럼을 쓰고, 때론 아프리카TV(온라인 실시간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동영상 강의를 진행한다.
기자에겐 '연애 전략'을 맡고 있는 강사가 배정됐다. 그는 기자를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공략하고 싶은 남성의 정보를 최대한 많이 제게 주세요. 그런데 일단 외모부터 대대적으로 바꿔야겠네요."
픽업에도 기술이 있다
픽업 아티스트의 코칭은 분야별로 나뉜다. '외적 매력' 수업부터 마인드 컨트롤을 가르치는 강좌, 화술 교육, 연애 전략까지.
외적 매력의 핵심은 '여성미' 강조다. 본인의 신체에서 가장 곡선을 강조할 수 있는 옷을 골라준다. 살구색 H라인 스커트와 하이힐이 권장되지만 타이트한 스키니진도 무난하다. 화장은 일명 '에스트로겐 메이크업'. 렌즈로 깊고 큰 동공을 만들고 빨간 틴트로 입술을 붉게 물들인다. 볼 터치로 홍조 어린 뺨을 연출하고 마스카라로 촉촉하고 풍성한 속눈썹을 만든다. 한 픽업 아티스트는 "'패션 피플'처럼 보이는 외모는 동성에게 어필할 뿐 연애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선 지양하는 게 좋다"고 했다.
외모뿐 아니라 자세도 중요하다. 핵심은 '활기'와 '곡선'. 픽업 아티스트 A씨(여·29)는 "3년 전 유행했던 'AOA 설현'의 'SKT 입간판 광고'를 연상하면 쉽다"며 "정자세로 서 있기보다 몸을 살짝 돌려 비틀고 어깨와 팔의 곡선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귀띔한다. "쥬얼리 광고 모델처럼 팔을 가볍게 포개거나 청춘 영화 주인공처럼 머리를 기울였다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넘기는 것도 효과가 좋다"고 조언한다.
마인드 컨트롤, 멘털의 균형을 잡는 건 픽업계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통한다. 집착하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역설적으로 '분산 투자'가 중요하다. 효율적으로 감정을 분산시키는 방법은 역시 '어장 관리'만한 게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 수강생 한영은(가명·27)씨는 "학원에서는 소셜 데이팅 어플을 이용해 여러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식으로 '훈련'을 권한다"고 증언한다.
화술 교육도 빠지지 않는다. 강사들은 이성과의 핑퐁 대화를 위해 카톡 답이 올 때마다 '답변 공식'을 일러준다. 데이트 전략에서 중요한 건 어설프게 수를 쓰지 않는 것. 픽업 아티스트들은 "'썸' 단계에서 밀당이 필요하다는 통설은 잘못됐다"며 "오히려 적절히 당기면서 호감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게 낫다"고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여성성을 강조하는 건 시대착오적이지 않으냐"는 질문에 픽업 아티스트들은 "우리는 남자들 비위를 맞추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효율적으로 공략하는 법을 가르칠 뿐"이라고 답했다. 여권 신장 추세에 따라 여성이 관계를 주도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픽업 아티스트'의 의미도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서 '픽업 아티스트'를 검색하면 '카사노바 양성소'류의 게시물이 랭크되던 2010년대 초반과 달리 2019년 2월 말 현재 12개의 '연애 컨설팅 사이트'가 검색 결과 상위에 올라 있다.
유사 심리학 강의라는 비판도
지난 26일 저녁 아프리카TV 채널의 비공개 방에 접속했다. 이날은 픽업 아티스트 B씨의 '무료 특강'이 있는 날. 주제는 '나는 왜 늘 시끄러운 연애를 하는가.' 그는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들을 위해 2시간에 걸친 '열강'을 시작했다.
강의는 시원한 육두문자와 인생 조언의 결합이었다. 왜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꼭 다른 여자를 만나고 유흥을 좋아하며 알고 보니 신용불량자에 지명수배자란 말인가. 나는 정말 순애보 청춘물을 찍고 싶은데 왜 자꾸 악당 조커와 좀비 100마리가 덤비는 공포영화를 찍게 되는가. B씨는 "일단 그런 남자는 무조건 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재난 같은 연애에서 승자가 되려면 본인 스스로 더 센 '재난'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하고 물불 안 가리는 악바리에 '깡 센 여성'이 되면 그런 남자도 감당할 수 있다"고 끝맺는다. 수강생들은 물개박수를 치며 "유용한 강의였다" "감사하다"는 등의 후기를 남겼다.
이런 부류의 여성 픽업 아티스트 커뮤니티는 어림잡아 15개가 활동 중이다.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3000명이 이르는 곳도 있다. 커뮤니티의 사회적 순기능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도 있다. 이들은 "요즘 세대는 연애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해결 방식을 모색하려고 한다"며 "멘토를 찾아 고민을 나누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픽업 아티스트류가 주장하는 기술과 노하우는 여러 심리학 이론의 짜깁기"라고 말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인간관계에서는 인위적 기술보다 진심의 교류를 추구하는 게 개성을 발현하고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