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서울 영동고에 진학하는 아들을 둔 학부모 윤수정(가명·42)씨는 입학 안내서를 훑다 '학교 점퍼'라는 항목을 보았다. "교복 하면 재킷·바지·셔츠 3종 세트만 생각했는데 신기했죠. 90년대 중반 제가 대학 시절 입던 '과잠(야구 점퍼 스타일 학과 점퍼)'같이 생겼더라고요. 애들 입기엔 각 잡힌 재킷보다는 확실히 편할 듯해요."
학교 점퍼뿐만 아니다. 후드 집업(모자 달리고 지퍼로 여닫는 스타일), 맨투맨 티셔츠(깃이 없는 티)까지 캐주얼 교복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편안한 교복'. 변화는 빨라질 전망이다. 지난달 서울시 교육청에서 서울 시내 모든 중고교에 1학기 중 '편안한 교복' 공론화 추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존 교복 개선부터 아예 교복 폐지까지 논의되고 있다.
교육열 높은 한국 사회에서 교복은 학교 유니폼 개념을 넘은 사회적 산물이다. 시대상을 반영해 변해오면서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교복의 역사와 현안을 짚었다.
교복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전문가들은 한국 교복의 역사를 길게는 600여 년, 짧게는 130여 년 정도로 본다. 우리 교복의 원조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 성균관 유생이 입었던 청금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 교복은 1886년 이화학당의 한복 스타일 다홍색 치마저고리 교복, 남학생 교복의 시초는 1898년 배재학당의 검정 양복 스타일 당복(堂服)이었다. 1907년 숙명여학교가 최초로 자주색 원피스로 된 서양식 교복을 도입한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한복 교복이 금지되면서 양장 교복이 확산했다. 1940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여파로 전시복이 등장해 여학생들은 '몸뻬(일본식 여성 작업복 바지)', 남학생은 국방색 교복을 입었다.
해방 후 일제식 교복이 이어지다가 1969년 중학교 평준화가 시작되면서 학교별 차이를 없앤 획일화한 교복이 도입됐다. 여학생은 여름엔 흰색 윙칼라(날개처럼 살짝 뜬 형태) 블라우스에 감색이나 검정 치마, 겨울엔 감색이나 검정 상·하의로 통일했다. 남학생은 겨울엔 검정 스탠드 칼라(깃이 세워진 스타일) 상의, 여름에는 회색 교복을 주로 입었다.
교복이 잠깐 없던 시절도 있었다. 1983~1985년에는 교복 자율화 조치가 시행됐지만 위화감 조성 등 부작용으로 1986년 다시 교복 착용이 허용됐다. 1970년대생 또래는 교복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세대. 이은선(49)씨는 "교복 자율화에 딱 걸려 한 번도 교복을 입은 적이 없다"며 "아이들의 개성과 취향 존중이라는 점에서 교복을 안 입는 게 나은 것 같다"고 했다. 반면 김은정(49)씨는 "딱 그 나이에만 입을 수 있는 옷인데 못 입어서 그런지 교복에 대한 환상이 있다"고 했다.
반복되는 교복 전쟁
"교복 허리를 1~2인치 줄이고, 스커트 길이를 늘였다 줄였다 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는 우스꽝스러운 행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큰 문제입니다." 얼핏 요즘 여학생들 얘기 같지만 '교복·교모 없앨 수 없느냐'는 제목으로 1981년 11월 14일 조선일보 기사에 실린 K여고 2년 M양의 하소연이다. 38년이 지났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정은서(가명·16)양은 얼마 전 교복을 사자마자 치맛단을 한 단 줄였다. "친구들 70~80%가 치마를 수선했어요. 다리가 길어 보이고 꼭 맞아야 예뻐 보여서요."
교복이 딱 붙는 스타일로 변한 건 2000년대 초반. 형지엘리트 디자인팀 이미선 팀장은 "2000년대 초반 '브랜드 교복'이 등장하면서 허리가 쏙 들어간 타이트한 디자인이 경쟁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무릎에서 15~20㎝ 정도 올라온 짧은 치마에 허리를 약간 덮는 길이의 재킷이 유행"이라고 했다. "슬림핏의 절정은 2014~2015년"이라고 했다. "2014년 교복 구매 방식이 '개별 구매'(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교복 브랜드를 선택하는 방식)에서 '학교 주관 구매(학교가 한 업체를 선정)'로 바뀌면서 아이들의 선택권은 줄고 학교 결정이 중요해졌다. 학교가 공지한 지침에 맞춰 제작하다 보니 교복 핏이 좀 여유로워졌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엔 여전히 슬림핏이 유행이다. 교복을 산 뒤 치마 길이와 품을 줄이는 여학생이 많다. 결국 1~2년 전 '코르셋 교복' 논란이 일었다. 여고생 교복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사이즈와 비슷해 실용성이 떨어지고 건강에도 안 좋다는 지적이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지난해 제2기 교육감 선거 공약으로 편안한 교복 도입을 내세우고, 그해 7월 '편안한 교복 공론화 추진단'을 꾸렸다. 작년 토론회에서 공론화 시민 참여단(229명)은 '편안한 교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학교가 지정한 생활복'(45.8%)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기존 교복 개선'(22.2%), '교복 자율화'(17.3%), '상의 지정, 하의 자율'(10.2%) 순이었다. 서울시 교육청 홍봉권 장학사는 "2019년 1학기에 학교 공론화를 추진하고 2학기 때 학교 주관 구매 절차에 따라 교복을 구매하게 되면 2020년 신입생부터 사실상 적용된다"며 "자율화로 결정하게 되면 2학기 때 적용할 수도 있지만 현재 흐름을 봐선 기존 교복을 개선하거나 생활복을 확대하는 방향이 우선일 것 같다"고 했다.
후드, 집업… 변형 교복 확대
일반 교복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생활복' 교복은 2000년대 중후반 등장했다. 주로 반바지·티셔츠 형태. 최근 주목받는 스타일은 후드 티, 야구 점퍼 스타일이다. 서울 한가람고는 2012년 '후드 교복'을 도입했다. 학교 관계자는 "재킷이 불편한 학생들은 겨울에 기모 후드를 입고, 여름에 냉방기 찬 바람이 싫은 학생들은 후드를 덧입는다"며 "학생들이 동복·춘추복·하복 경계 없이 편리한 대로 입으니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서울 월촌중은 올 신입생부터 아예 교복 재킷을 필수 항목에서 제외하고 후드 집업으로 대체키로 했다.
단체복 제작 업체 썬어패럴 송호민 대표는 "6년 전쯤 과천외고에서 교복 재킷 대용으로 입을 수 있는 학교 점퍼를 제작한 이후 3년 전부터 붐이 일었다"며 "대원외고 등 다른 학교로 퍼지더니 최근엔 서울 중앙고·경희고·경희여고·동성고, 강릉 율곡중 등으로 퍼져 현재 야구 점퍼 교복은 40~50곳, 후드 교복은 30곳 정도 납품하고 있다"고 했다. 가격은 점퍼 스타일은 4만원 초반~7만원대, 후드 티는 2만원대라고 했다.
27년간 교복을 디자인해온 스마트에프앤디 디자인연구소 이영은 소장은 "예나 지금이나 교복을 둘러싼 학생과 학부모 생각은 동상이몽"이라며 "학생은 '예쁘고' 편한 교복을, 부모는 '학생답고' 편한 교복을 원한다. 절충안을 찾다 보면 아이들 눈엔 '구린 옷', 어른들 눈엔 '날라리 옷'이 된다"며 웃었다. 그는 "과거엔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옷'으로 결정 주체가 학교였다면, 요즘은 '생활하기 위한 옷'으로 접근해 학생들 발언권이 커지는 게 큰 변화"라고 했다.
교복 모델을 보면 뜰 아이돌이 보인다?
신인 발굴해 싼 가격에 계약
차태현, HOT, 문근영, 비, 김연아, 이종석,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김수현, 수지, BTS…. 이들 공통점은? 교복 모델을 거친 스타란 점이다.
요즘은 교복 모델이 아이돌 필수 코스로 통한다. 스마트학생복, 엘리트학생복, 아이비클럽, 스쿨룩스 등 '빅4'로 통하는 교복 브랜드에선 아이돌 모시기 경쟁이 치열하다. SNS 홍보에 좋고, 판촉용 브로마이드도 인기 끌기 때문.
형지엘리트 권오성 마케팅팀장은 "이미 뜬 아이돌은 모델료가 너무 비싸 갓 데뷔하거나 데뷔 예정인 신인을 발굴하는 추세"라며 "소속사에서 리스트를 만들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엘리트교복의 경우 소녀시대, 인피니티를 뜨기 전 모델로 기용해 효과를 봤다. 이렇다 보니 '교복 모델을 해야 뜬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올해 모델은 스마트 'BTS', 엘리트 'NCT', 아이비클럽 '스트레이 키즈', 스쿨룩스 '더보이즈' 등이다.
한 교복 업체 관계자는 "아이돌은 뜨고 나면 몸값이 천정부지로 뛴다. 교복 업체에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 지원하면서 출연자를 싼 가격에 모델로 쓰는 조건을 걸기도 한다"고 했다. 입도선매(立稻先賣)인 셈이다.
최근 교복업계 화제는 BTS(방탄소년단). 스마트에프앤디는 BTS가 뜨기 전인 2016년 모델로 계약했다. 월드 스타가 된 지금이라면 어려웠을 계약이다. 이 회사 마케팅팀 이인진 과장은 "내부적으로 아이돌 모델을 쓸 때 멤버 중 적어도 한 명은 학생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데 BTS와 계약할 당시 막내 정국이 고등학생이라 가능했다"며 "결국 신의 한 수가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