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를 먹어도 행복했다. 소갈비를 먹기 전까지는 그랬다. 수원 살던 고모부가 뒷짐을 지고 앞장섰다. 길은 소갈비집으로 이어졌다. 고모부 단골집은 지척이었다. 반찬이 한상 가득 깔리고 고기가 등장했다. 소금 양념이 살짝 된 소갈비가 양복바지 자락처럼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접시 위에 놓였다. 불이 올라왔다. 불판도 위장도 예열에 들어갔다. 고기가 올라가고 '치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고모가 말했다.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도 하다.
"좀 천천히 먹어라. 고기 안 익었어!"
앞만 보고 달리는 종마처럼 나와 동생 그리고 사촌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고기는 씹을 필요가 없었다. 설탕을 넣은 양념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몸의 신경은 오직 혀와 위에만 작용했다. 접 붙은 개에게 끓는 물을 끼얹듯 고모는 밥을 따로 시켜 배를 채우게 했다. 하얀 쌀밥에 구운 소갈비를 올려 입에 넣으니 미각세포들이 꽹과리를 치고 북을 울렸다. 인원의 몇 배수를 시켜먹고 말았다. 나갈 때 지갑을 꺼내드는 고모부의 뒷모습에 뿌듯함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고맙습니다"라고 차마 크게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소고기는, 그중에서도 소갈비는 최고급 취급을 받는다. 뼈 근처에 붙은 살이 내는 풍미와 연한 살코기, 달큰한 양념이 어우러지면 그 옛날 이방원처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를 읊조리게 된다. 소갈비 잘하는 집을 꼽자면 전국 지도를 펼쳐 놓아야 한다. 그만큼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외식이다. 그럼에도 1937년 영업을 시작한 서울 을지로3가 '조선옥'은 늘 첫손에 꼽혀야 한다. 이유는 여럿이다. 한우가 아니라 육우를 써서 값이 비교적 저렴한 것이 첫째, 다 익혀 나오기에 번거로이 뒤집지 않아도 되는 것이 둘째다. 양념이 간결해 맛이 잡스럽지 않다. 이어 붙이지 않은 갈비살은 씹을수록 가을 녘 햇살에 말린 곶감처럼 진득한 맛을 흘려보낸다. 1000원 하는 시원한 무국도, 담담히 자리를 지키는 장승처럼 무던한 맛을 내는 냉면도 늘 튼튼한 갈빗대처럼 맛이 한결같다. 익혀 나오는 터에 쉽게 식는 것이 단점이지만 먹는 속도를 조금 높이면 해결될 일이다.
조선옥이 '소갈비 명예의 전당' 꼭대기를 예약해놨다면 삼각지 '몽탄'은 신인상을 노리는 집이다. 국방부에서 효창공원 넘어가는 삼각지 고가차도 옆, 옛 교회처럼 생긴 건물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면 그 집이 몽탄이다. 문을 연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이유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줄에 함께 서면 된다. 실내로 들어서면 큰 화로에 짚을 쌓아두고 불을 붙여 고기를 초벌로 굽는다. 메뉴는 두 가지. 돼지 삼겹살과 '우대갈비'라고 이름 붙인 소갈비다. 삼겹살도 좋지만 우대갈비를 빼먹으면 오래 줄 선 보람이 없다. 못해도 아이 팔뚝만 하게 길게 자른 갈빗대를 윤이 반질거리는 솥뚜껑 불판 위에 올리면 화려한 세리머니가 시작된다. 열이 오른 불판에서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는다. 종업원이 한입 크기로 잘라 긴 뼈 위에 정렬시켜 놓는다. 이제 할 일은 남보다 더 빨리 젓가락을 놀리는 것뿐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변화구처럼 단맛과 짠맛의 경계를 관통하는 맛이 치고 들어온다. 소갈비의 부드러운 조직감과 어우러져 엇박과 정박으로 들고 나고 솟고 꺼진다. 곁들인 무생채는 살짝 얼어 있는 상태로 나온다. 뜨거운 고기와 정반대인 차가움이 혀에 쾌감을 얹는다. 파를 송송 썰어 넣은 간장 양념장도 맛에 명암을 더하는 조연이다. 무심히 냉이를 수북이 올린 걸쭉한 된장찌개, 매콤하고 달곰하며 아삭한 양파볶음밥은 주인장의 오랜 연구와 기획의 산물임이 느껴진다. 이쯤 되면 푸지게 먹어 살이 몇백 그램 올라도, 온몸에 밴 고기냄새가 쉽게 가시지 않아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 소갈비를 먹었으니까, 소갈비니까 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