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덕으로 근근이 가문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최근 인심이 옛날 같지 않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강제로 역(役)을 지우고 죽은 사람에게도 강제로 포(布)를 거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통탄함을 이길 수 없다."

1856년(철종 7년), 충훈부(조선시대 공신과 후손들에 관한 사무를 맡은 관청)의 공문을 받은 경상도 병마절도사가 영덕현령에게 보낸 관문(關文·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낸 공문서·사진)의 내용이다. 사연은 이랬다. 문필용과 문학손 등은 고려 말 목화씨를 들여와 조선 조정으로부터 공신에 봉해진 문익점(1329~1398)의 후손으로 그리 부유하게 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공신의 후손이라 면제 대상인데도 군역을 지는 것은 물론,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징수하는 '백골징포'의 피해까지 봤던 것이다.

세제(稅制)가 헝클어지고 지방관의 횡포가 심하던 조선 말의 상황을 잘 전해 주는 이 '관문'과 문익점 후손들이 충훈부에 진정한 '원정(原情)'을 포함한 250여 점의 조세(租稅) 관련 자료가 새로 공개됐다. 고창석(74) 전 한국고서협회장이 소장 유물을 정리해 최근 펴낸 '사료로 보는 조세도록'(보문전)을 통해서다. 자료들은 관안류, 임명장류, 조세장려류, 장부류 등 15개 항목으로 분류됐다.

1836년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 유씨 문중이 가문 중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기금을 길러 세금을 납부하도록 한 '의장절목(義庄節目)', 세금 처리 등을 기준으로 지방관을 상·중·하로 등급을 매긴 근무평정표 '기미추동등포폄제목(己未秋冬等褒貶題目)',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헌납한 사람에게 실제 업무를 보지 않는 관직을 내린 '납미영직교지(納米影職敎旨)' 등의 자료들도 이 도록을 통해 함께 공개됐다.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조선시대 각 분야에 걸친 희귀한 조세 자료를 모아 상당한 가치가 있는 자료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