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 댓글 그려주는 한 컷 삽화로 화제
"면접 봤는데 저 혼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었어요. 구두 때문에 아픈 제 발이 어떤 생각이었는지 그려주세요."
"우린 괜찮으니까 기죽지 마 제발."
요즘 인기를 끄는 인스타툰이 있다. 독자들이 원하는 그림으로 그려주는 키크니(Keykney)의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다’다. 지난 7월 연재를 시작한 이래 현재 2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우리 강아지는 무슨 생각 할까요?" 유머와 감동 섞인 한 컷 삽화
키크니 작가는 9년 차 일러스트레이터다. 주로 어린이 교과서와 잡지, 기업홍보물 등에 삽화를 그렸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 일상 만화를 올렸다가, 댓글로 반응이 오는 걸 보고 소통의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독자들이 원하는 상황을 한 컷 삽화로 그려주는 연재를 시작했다.
어느 날 강아지 또또의 사연을 받았다. ‘3년 전 무지개다리 건너간 또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라는 견주의 요청이었다. "머리를 맞은 것 같았어요. 어떻게든 그분을 위로하고 안정을 주고 싶었죠. 무겁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게." 작가는 견주를 다시 만나면 더 말 잘 듣고 재밌게 놀려고 열심히 한글 공부 중인 또또의 모습을 그려줬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유머와 감동이 섞인 키크니 식 삽화다. 마음을 울리는 삽화에 독자들은 하나둘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림으로 답하면서 작가와 독자와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키크니의 삽화는 착하고 친절하다. 그의 그림엔 ‘따뜻한 위로가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평이 넘친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누구나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욕이나 정치 성향은 배제하고, 게시물을 올리기 전엔 꼼꼼히 자기검열을 거치죠."
◇ 참여형 인스타툰, 소통 창구로 인기
최근 문화계는 제작자와 사용자가 함께 완성해가는 참여형 콘텐츠가 뜨고 있다. 시청자가 스토리를 선택하는 넷프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AI 음성기술을 이용해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줄거리가 달라지는 네이버 ‘동화 만들기’ 등이 대표적. 독자들의 원하는 만화를 그려주는 키크니 인스타툰도 이에 해당한다. 영상 콘텐츠가 사용자에게 몇 가지 상황을 주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라면, 키크니 그림은 사용자가 상황을 주면 제작자가 창작하는 것이 차이.
소통한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공감이다. 인스타툰만 해도 키크니처럼 댓글을 그려주는 작가들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 이목을 끌지 못했다. 작가는 "동료 작가나 마케터들이 종종 마케팅을 어떻게 했냐고 묻는데, 애초에 그런 개념이 없었다. 독자도 저도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다. 감동 코드가 반응이 좋다고, 억지로 끌어내지도 않는다"고 했다.
"제 그림이 특별히 재미있다기보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위로 받는 창구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동안 달린 댓글을 모아 보려고 출력했더니, A4용지 양면으로 1000장이 넘었어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아야 할 만큼, 소통이 어려운 시대란 걸 실감했죠."
작가는 댓글 그려주는 일로 자신도 치유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2017년 공황장애와 번아웃 증후군을 겪었다. 그림을 그만둬야 할 만큼 힘들었을 때 인스타툰을 시작했고, 수많은 독자와 댓글로 소통하면서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상업용 삽화를 그릴 땐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죠. 독자들의 댓글을 그리면서 감동하고 위로받아요. 이래서 그림 그리는구나 싶고요."
직업적으로도 전환기를 맞았다. 오는 3월에는 그동안의 작업물을 모은 단행본을 출간하고, 5월에는 신생 웹툰 플랫폼에서 일상 만화 연재를 시작한다. 키크니 이모티콘도 곧 만날 수 있다. 광고 협업 제안도 많이 들어오지만, 독자들에게 이로운 이벤트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게 원칙. "앞으로도 댓글 그리는 일을 계속할 거예요. 제 콘텐츠를 보는 분들이 불편함 없이 잠시라도 재미있게 놀다 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