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롤로덱스(Rolodex) 정치'라는 말이 있다. 롤로덱스는 명함꽂이 상표명이다. 미국 대통령이 수시로 이를 뒤적이며 상·하원 의원과 직접 통화해 정책을 설득하고 밥 약속을 잡는 정치 스타일을 말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재선 후 첫해에 예산 문제로 정부와 의회가 정면충돌하자 야당 상원 의원 24명을 백악관으로 불러 저녁을 대접했다. '오바마 저격수'로 불렸던 라이언 공화당 부통령 후보와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는 사흘 연속 의회를 찾아 여야를 안 가리고 만났다. 뒤에도 '식사'와 '전화 돌리기'는 레임덕을 줄인 비결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초만 해도 칼국수를 차려놓고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함께 밥을 먹으며 직접 이해를 구하고 나면 비판 강도가 한결 누그러졌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친인척·측근 비리가 터지면서 YS의 밥 자리도 흐지부지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삼시 세끼 가리지 않고 '번개 호출'을 자주 했다고 한다. 첫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은 "나와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부부가 번개 회동의 단골이었는데 거의 인권 침해 수준이었다"고 했다.
▶그때 '인권 침해'를 당했던 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에게 "혼밥 하시느냐?" 하고 대놓고 물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혼밥'을 부인하며 비공개 오·만찬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 혼밥 소문은 국회의장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통령 혼밥은 '위험 신호'로 봐야 옳다는 걱정이 많다. 대통령이 다른 의견을 폭넓게 들을 기회는 결국 국가와 국민의 재산이 된다.
▶어제 자유한국당 여의도연구원이 문 대통령 취임 이후 공개된 일정을 모두 분석했다. 대통령 식사 회동은 지난 600일 동안 1800끼니 가운데 100회였다. 6일 중 한 번만 다른 사람과 공개적으로 밥을 먹은 것이다. 나머지 식사는 누구랑 했는지 모른다. 전체 일정 2144건 중 4%인 86건만 의원들과 만났는데, 야당은 26건에 그쳤다. 설득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 첫날 야당 대표 넷을 모두 만날 때만 해도 '소통(疏通) 대통령'을 기대하는 국민이 많았다. 그러나 '혼밥'을 하거나 자기편끼리만 밥을 먹는다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사와는 멀어지는 셈이다. 올 들어 문 대통령이 여당 인사와 자주 식사하는 모습은 다행스럽다. 반대파와도 겸상하는 자리가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