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포의 원료 쥐치가 1978년 연근해 어획량 1위 생선이 됐다고 보도한 기사(위)와, 삼천포(사천시)에서 쥐포를 만드는 모습(경향신문 1979년 2월 6일 자, 1990년 2월 13일 자).

1979년 5월 22일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여성 무기수 18명이 교도소 측 특별 배려로 딱 하루 외출해 용인자연농원에 나들이를 갔다. 변해 버린 세상 모습에 놀라던 여성들은 '가장 신기한 것' 세 가지로 고속도로와 새마을 주택, 그리고 새로 등장한 주전부리 하나를 꼽았다. 노점에서 팔던 쥐포 구이였다(동아일보 1979년 5월 23일 자). 그만큼 쥐포의 역사는 오징어 등 다른 건어물보다 짧아도 한참 짧다. 원료인 쥐치는 본래 껍질이 두껍고 맛도 없어서 그물에 걸리면 어부들이 도로 바다에 내던지던 생선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오징어 값이 폭등하자 대용품으로 조미 쥐포가 개발되면서 쥐치의 운명이 뒤집혔다. 달콤짭짤하게 양념한 쥐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거리마다 쥐치포를 구워 파는 리어카 행상이 즐비하다"는 신문 기사가 1978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쥐포 인기가 치솟자 어민들은 너도나도 쥐치잡이에 나섰다. 1978년엔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잡힌 모든 생선 중 쥐치가 16만1917t으로 어획량 1위에 올랐다. 그 전까지 1위이던 멸치는 2위(13만622t)로 밀렸다. 찬밥 신세였던 생선이 하루아침에 챔피언에 오르자 언론은 "바닷고기 어획 랭킹의 이변!"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남해안의 삼천포(사천시)는 쥐포 최대 산지로 떠올랐다. 1978년 이 도시에 모여든 어획량의 80%가 쥐치였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쥐포는 군것질 좋아하는 젊은 여성들이 최대의 소비자였다.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말쑥한 숙녀들까지도 쥐포를 열심히 우물거렸다. 1984년 7월엔 LA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여자선수 몇사람이 선수촌에서 쥐포를 구워 먹었다가 LA타임스가 '한국 선수들이 뱀고기를 먹었다'고 오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미국 기자가 선수들에게 "당신들이 먹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선수들이 '스낵(snack)'이라고 답했으나 기자가 '스네이크(snake)'로 알아들은 게 문제였다. 깜짝 놀란 기자가 "스네이크?"라고 몇 번 확인했지만, 한국 선수들이 계속 "예스"라고 답하는 바람에 그런 기사가 나갔다.

쥐포는 맛있는데 쥐를 연상시키는 이름은 싫다는 사람이 꽤 있었다. 오죽하면 국무총리까지 이 문제를 거론했다. 1978년 11월 2일 중앙청에서 열린 전국 우수 새마을 지도자 다과회에서 최규하 총리는 어민과 대화하다가 "쥐치란 이름이 미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좋은 이름이 없는지 어류학자들에게 알아보라"고 권유했다(동아일보 1978년 11월 3일 자). 실제로 1988년 경남 쥐치포 가공 조합은 '쥐치포' 대신 '복지포'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낯선 새 이름은 별로 쓰이지도 않다가 사라졌다.

이젠 그 이름을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이 쥐포는 '국민 술안주'이고 '국민 주전부리'다. 특히 최근 오징어 값이 크게 오르자 쥐포가 더 주목받는 듯하다. 지금 한창인 각 지방 축제를 들여다보니 '추억의 간식 연탄불에 구워 먹기' 코너마다 예년에 있던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고 쥐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징어가 비싸 쥐포를 대신 먹기 시작했던 40여년 전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추억 여행 한 마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