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프로배구에는 ‘얼짱 통역사 계보’가 있다. 왼쪽부터 성리사, 최윤지(흥국생명), 홍이수(인삼 공사)씨.

여자프로배구 경기 중에 한 팀이 작전타임을 부른다. 생중계 카메라가 감독을 잡는다. 고구마가 목에 걸린 표정. 답답하다는 투로 감독이 외국인 선수에게 주문한다. "(공을) 밀어 때려야지!"

밀어 때리라고? 외국인 선수 옆에서 수건과 물병을 들고 있던 통역사가 당황한 기색 없이 작전을 전달한다. 뭐라고 했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외국인 선수가 이날 승리를 이끌고 인터뷰할 때 '그녀'가 다시 TV 화면에 등장한다. 호감형 얼굴에 통역 솜씨도 매끄럽다. "최근 여자배구는 선수들의 경기력과 외모뿐만 통역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아저씨 팬들의 주장이 빈말은 아니다.

프로배구 2018~19시즌 1~3라운드에서 평균 관중은 여자부가 경기당 2286명으로 남자부(2192명)를 앞질렀다. 지난 시즌과 견주면 여자배구는 23% 늘었고 남자배구는 7% 줄었다. KGC인삼공사 박태수 사무국장은 "여자배구 평일 경기 시간을 오후 5시에서 7시로 옮기자 '직관 팬'이 많아졌다"며 "미세먼지 걱정 없이 즐기는 실내 스포츠이고 아기자기한 데다 선수들도 예뻐졌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한국도로공사 김삼현 운영팀장은 "몇몇 통역사는 인기"라며 "방송을 타고 주목 받는 걸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이세윤, 윤진아, 성리사, 최윤지…. 아저씨 팬들이 읊어대는 '얼짱 통역사의 계보'다. 2015년에는 현대건설 성리사 통역이 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시즌 중 팀을 떠나자 "그녀를 복귀시키라"는 온라인 청원도 벌어졌다.

현역 통역사 중에는 최윤지(흥국생명) 홍이수(인삼공사) 윤재이(도로공사)씨가 자주 언급된다. 디시인사이드 여자배구 갤러리에는 "도로공사 통역 실력 좋고 귀엽다" "흥국생명 통역사는 외모 보고 뽑은 건가" "인삼공사 통역이 미모 탑" 같은 글이 올라온다.

여성 통역사를 인기 또는 마케팅 수단으로 보는 것일까. 구단 담당자들은 "통역사가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대우가 좋지 않고 외국인 선수 뒷바라지에 운전 등 온갖 잡일까지 한다"며 "언어 능력과 희생정신이 필요할 뿐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24시간 룸메이트처럼 외국인 선수와 합숙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험이 없는 신입의 보수는 월 300만원 수준이다. 외국인 선수가 팀을 옮길 때 따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통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직접 통역해야 하는 자리다.

통역사는 프리랜서다. 최윤지씨는 인삼공사, 현대건설을 거쳐 흥국생명에서 일하고 있다.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8개월쯤 일하고 비시즌엔 다른 곳에서 단기 통역을 맡거나 휴식을 갖는다.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셈이다. 체육학을 전공했고 영어·스페인어에 능한 그녀는 "TV에 나오니 가족이나 친구는 좋아하는데 첫 시즌엔 배구 용어를 몰라 고생이 많았다"며 "외국인 선수와 한 몸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희로애락을 같이한다"고 했다.

'밀어 때려'는 영어로 어떻게 옮길까. 최윤지씨는 "직역하면 외국인 선수가 못 알아들어 'hit deep'라고 말한다"고 했다. '손끝 보고 때려'는 'hit deep using blocker's tips'로, '네트에 공이 붙었을 때 상대 블로커 손에 대고 안테나 쪽으로 밀어내라'는 'wipe'로 각각 옮긴다. 그녀는 "추운데 매번 와서 사진 찍어주고 응원해주시는 팬들이 있다. 좋은 모습 보이고 싶어 화장을 열심히 하고 나간다"며 웃었다.

최고참 통역사는 2013~14시즌 도로공사를 시작으로 GS칼텍스를 거쳐 인삼공사에 스카우트된 홍이수씨다. 그녀는 "다른 구단 신참 통역사가 궁금한 걸 물어오는데, 팀마다 용어가 다를 수 있고 '영업 비밀'이기도 해 전부 얘기해줄 수는 없다"고 했다. 외국인 선수가 부상에 시달리면 통역사가 더 힘들다. 홍이수씨는 "부정적인 감정이 저를 통해 지나갈 때마다 감정소모랄까, 금방 피로해진다"면서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외국인 선수와 함께 생활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조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여자배구계에는 '성형수술 명단'이 돌아다닐 정도로 성형이 흔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고, 방송 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경우도 잦다. 얼짱 통역사는 "꾸미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장할 시간에 훈련을 더 하라'는 말은 시대착오"라며 덧붙였다. "어떤 식으로든 관심이 생겨 배구로 이어지면 좋은 일이니까요. 따로 만나자고 하는 팬들도 있어요. 과하지 않게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