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전쟁도 전쟁이지만, 점심은 예정대로 제때 먹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춥고 겨울이 긴 데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러시아도 우리나라처럼 끼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음식 문화가 강력하다. '시베리아 한파'가 이어지는 겨울의 중턱, 더욱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는 러시아·우즈베키스탄인들의 식탁을 만나러 갔다. 러시아 국민 수프 '보르쉬'부터 러시아 대표 술 '보드카', 우즈베키스탄인들이 즐겨 먹는 '삼사'까지… 체온이 5도쯤 올라가는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음식&맛집 열전!
화덕에 구워낸 '삼사' 따끈할 때 제맛
서울 광희동 동대문운동장 부근 '러시아·몽골 거리' '중앙아시아 거리' '동대문 실크로드'로 불리는 '을지로 사잇길(을지로42길)' 주변은 200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맛집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던 곳이다. 현재 두어 달 전 문 연 카자흐스탄 식당을 포함해 10여 개의 식당이 영업 중이다. '포춘' '파르투내' 등과 함께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시티' '스타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등 우즈베키스탄의 대표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붙인 간판들이 눈에 띈다.
그중 스타사마르칸트는 매장 앞 화덕에서 바로 구워내는 우즈베키스탄 빵 삼사(3000원)로 유명하다. 우즈베키스탄 대표 음식 중 하나인 삼사는 다진 양고기나 소고기와 양파가 들어가는 빵. 화덕에서 갓 구워내는 삼사 향은 길 지나던 이방인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골목 안쪽 '사마르칸트(본점)'가 여기로 확장 이전했다. 올해로 14년째 우즈베키스탄 전통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오래된 곳답게 한국인 단골도 많다. 식당을 찾은 김현정(20)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 따라 외식하러 왔던 곳"이라며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음식은 중국, 베트남, 태국 등에 비해 향이 강하지 않고 담백해 입맛에 잘 맞는다"고 했다.
몇 페이지 분량의 다양한 메뉴 중에서도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메뉴는 대여섯 가지로 압축된다. 우즈베키스탄식 전통 볶음밥인 '프러프'(1만원)와 양갈비바비큐(1만5000원), 양배추고기말이(1만원), 러시아 전통 꼬치구이인 '샤슬릭'(개당 5000원) 등이다. 소·양·닭고기 샤슬릭 중 양고기가 특히 인기다. 특유의 양고기 냄새가 나질 않고 육질이 부드럽다. 샤슬릭은 고기 외에 소 간 꼬치와 토마토 꼬치 등도 있다. 영업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 30분까지.
'보르쉬' 곁들인 러시아 가정식 만찬
한국인들에게 된장찌개가 있다면 러시아인들에겐 '보르쉬(보르시)'가 있다. 보르쉬는 러시아식 전통 수프로 강렬한 체리 색을 띤다. 색 때문에 보기엔 맛이 달콤할 것만 같지만 한입 떠 넣는 순간 시원한 소고기 뭇국 맛이 떠오른다. 주재료도 소고기다. 체리색은 붉은 무인 비트가 빚어낸다.
서울 연남동의 러시아 가정식 맛집 부퓌에트발랴에선 '비트스프'(9000원)라 부르는 보르쉬가 인기 메뉴 중 하나로 꼽힌다. 주인 발렌티나(40)씨는 "겨울엔 비트스프와 함께 채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지라쟈냐(1만4000원)를, 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러시아식소고기볶음밥(8000원)을,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돼지감자요리(1만8000원)나 포크치즈스테이크(1만7000원), 치킨스테이크(1만8000원)를 즐겨 먹는다"고 했다. 비트, 양배추, 양파, 감자, 당근 등 잘게 채를 썬 채소를 듬뿍 넣어 시원한 맛이 나는 비트스프는 기호에 따라 곁들여 나오는 사워크림과 크루통(튀긴 식빵 조각)을 추가해 먹는다. "러시아에서 보르쉬는 끼니 대용으로 먹기 때문에 건더기를 많이 넣어 걸쭉하게도 끓여 먹습니다." 러시아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요리사로 일하다 4년 전 이곳에 식당을 연 발렌티나씨는 "이곳의 모든 요리는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천연 재료로 맛을 낸다"고 했다. 러시아 현지인들보다 우리나라 20~30대 가 즐겨 찾는 분위기다. 영업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정오부터 오후 9시까지(단, 오는 26일까지 겨울 휴가 기간으로 휴무 예정).
보드카·발티카 안주도 러시아식으로
한잔하면 목이 얼얼할 정도로 독한 러시아 대표 술 보드카와 맥주 발티카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태원의 러시아 맛집으로 자리 잡은 트로이카는 러시아의 대표 증류주 보드카와 맥주 발티카를 맛보려는 사람들에게 성지(聖地)와 같다. 음식 외에 안주도 러시아식으로 갖췄다. 러시아에서 흔히 먹는 보드카 안주 '자쿠소치카 크 보도치케'(1만2000원)는 바게트 위에 치즈나 훈제 삼겹살, 훈제 멸치를 올려 카나페처럼 생겼다. 우리나라식으로 치자면 치즈, 삼겹살, 멸치 삼합쯤 되는 비주얼이다. 한국어가 능숙한 러시아인 주인 일리아나(37)씨는 "소금에 절인 오이, 양배추, 버섯, 토마토를 넣은 샐러드 라즈노솔(2만원)과 소금에 절인 청어, 피클, 방울토마토, 삶은 감자로 만든 셀료도취카(1만원)도 러시아에서 보드카 안주로 즐겨 먹는 것들"이라고 했다. 보드카(1잔 6000원) 안주가 다소 '하드코어'라 느껴진다면 메인 음식을 곁들여도 괜찮다. 메뉴판 역시 보기 쉽게 한국어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러시아 전통과 문화를 알리고 싶어 식당을 열게 됐다"는 일리아나씨는 "러시아 음식 중에서도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구성했다"고 했다. 주인 말처럼 음식 맛이 낯설지가 않다. 러시아 목제 인형 마트료시카 등 소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업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11시까지.
러시아 케이크 전문점 등 새로 생겨
서울 광희동 을지로 사잇길 중앙에는 러시아 케이크 집도 새로 문 열었다. 러시아 전통 빵을 비롯해 '꿀케이크'(1조각 5000원), 캐러멜·클래식 에클레어(개당 3000~3500원), 감자 모양의 케이크 '감자'(3000원), 케이크 시트 사이에 머랭이 들어간 키에프케이크(5000원) 등을 골라 맛볼 수 있다. 파티시에이자 주인인 모로즈 이리나(41)씨는 "기존 러시아식 케이크에서 설탕을 많이 뺀 케이크를 선보이고 있다"고 했다. 꿀케이크가 베스트셀러다. 모든 케이크류는 조각 말고 통으로, 즉 홀케이크로도 주문 가능. 영업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까지.
최근 들어 러시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생기는 추세다. 지난 1월 초 문 연 서울 길음동 씨씨씨피(CCCP)는 러시아 관련 사업을 했던 한국인 주인 이정옥(59)씨가 운영한다. 양·돼지고기 샤슬릭을 비롯해 자신이 러시아를 오가며 맛있게 먹었던 메뉴만을 골라 보드카, 발티카와 함께 판매한다. 이씨는 "러시아인 요리사가 현지 음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여름 일산서구 대화동에 문 연 러시아 레스토랑 나탈리는 카자흐스탄인과 고려인 부모를 둔 막심(29)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아담하지만 깔끔하고 밝은 느낌으로 꾸민 인테리어 덕분에 20~30대 젊은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 러시아 음식에 고려만두, 고려국수 등 고려인 음식도 즐길 수 있다. 영업시간은 씨씨씨피의 경우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나탈리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