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고주리와 화수리 등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일대는 3·1 만세운동 중에서도 일제의 학살 만행이 가혹하게 자행된 지역이다. 일제에 맞서 무력으로 저항하는 등 상당히 공세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이후 만주와 러시아에서 펼쳐진 무장투쟁의 전(前) 단계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다.
화성 일대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말을 전후해 맹렬히 전개됐다. 3월 26일부터 송산면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28일엔 사강리에서 일본 순사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처단됐다. 31일 화성 발안 장터에서 1000여 명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고, 4월 1일 밤에는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던 화수리와 수촌리 마을이 참화를 입었다.
향남면(현 향남읍) 제암리 참변이 일어난 것은 4월 15일 오후의 일이다. 이미 화수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해 '강연이 있다'고 속여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했다. 일본군은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뒤 집중 사격을 시작했고,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불을 질렀다. 한 사람이 창문을 부수고 아들을 창밖으로 내어놓으며 '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군은 아이마저 칼로 내리쳤다.
불길은 5시간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들도 총칼에 희생됐다.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이 살해됐고 민가 30여 호가 불탔다. 일본군은 이날 팔탄면 고주리에서도 주민을 학살했다.
제암리·고주리 참변은 선교사 언더우드와 스코필드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세계 여론의 지탄이 이어지자 일제는 7월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7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의 일기가 발견돼 일제가 제암리 학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