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수유병집: 글밭의 이삭줍기
정민 지음 | 김영사 | 264쪽 | 1만3800원
"추수 끝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듯 그동안의 글을 모으고 정리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시경’ ‘대전(大田)’에는 "저기에도 남은 볏단이 있고, 여기에도 흘린 이삭이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교수가 낸 산문집 ‘체수유병집(滯穗遺秉集)’이란 제목은 이 구절에서 따왔다. 체수는 낙수, 유병은 논바닥에 남은 벼이삭을 뜻한다. 추수 끝난 들판에서 여기저기 떨어진 볏단과 흘린 이삭을 줍 듯, 그동안 수십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미처 담지 못하고 아껴두었던 이야기 50편을 모아 한 권으로 엮었다.
책은 글의 성격에 따라 4부로 나뉜다. 1부 ‘문화의 안목’에서는 그동안 옛사람의 독서법을 소개해왔던 저자가 자신의 독서법을 소개한다. 그에게 독서란 단순한 지식을 구하는 일이 아니다. 질문을 바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고, 새로운 저작의 착상도 얻는다. 남들이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을 보는 것, 기성의 전복과 일상의 해체, 그것이 독서의 즐거움이자 목표다.
2부 ‘연암과 다산’은 저자가 사랑한 두 지성 박지원과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연암 특유의 문체적 불온성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연암의 문체는 불온하다. 그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던 가치를 거부했다. 그는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고, 바꾸어 보았다. 그래서 늘 시대의 금기를 건드렸다." 연암의 불온성에 정조는 그의 문체를 바로잡기 위한 카드를 내놓는다. ‘문체반정(文體反正)’. 즉 문체를 바르게 되돌려놓음으로써 지식인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인데, 과연 동서고금 어떤 임금이 문체를 카드로 내세워 사회 기강을 확립하겠다고 나선 경우가 있었던가?
3부 ‘옛 뜻 새 정’은 ‘장광설’, ‘습용관’, ‘호질’, ‘여표송인’ 등 옛 뜻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그중 표현욕을 뜻하는 기양(技癢)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얕은 재주로 자신을 뽐내기 바쁜 현대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4부 ‘맥락을 찾아서’에서는 변화의 시대, 인문학의 쓸모와 공부의 방법에 대해 다룬다. 특히 옛것이라 불리는 ‘고전’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옛사람은 남을 따라 하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서 고전이 되었다. 지금 내가 그들의 자취를 제대로 배우는 길은 그들을 그대로 흉내 내지 않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야 훗날 사람들이 내가 한 것을 두고 고전이라고 부를 것이다. 변치 않는 옛날이 되려면 변해야 한다."
다산은 보름에 한 번은 책상을 정리하라고 했고, 연암은 젊은 날에 쓴 메모 쪽지를 냇물에 흘려 지웠다. 하루하루 바쁘게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한 번씩 치우고 버리고 정돈해야 정신이 든다. 저자는 새해를 맞아 추수 끝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그간의 시간을 정리하며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어 보라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