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공연을 잘 마칠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처음엔 잘하다가도 공연이 길어지면 통제받는 기억이 쌓이면서 무대를 피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즐기더군요. 완전 무대 체질이죠, 하하!"

최근 막 내린 서울시뮤지컬단의 송년 뮤지컬 '애니'에는 특별한 배우가 출연했다. 고아 소녀 애니의 곁을 듬직하게 지키는 강아지 '샌디' 역을 맡은 골든레트리버 '달봉이'. 올해로 네 살 된 달봉이는 애니를 향해 달려가는 연기는 물론, 애니가 부르는 주제곡 'Tomorrow'를 따라 "아우~" 소리를 내며 울거나 짖는 애드리브를 선보이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온라인엔 "샌디 노래를 듣다 울었다" "개의 탈을 쓴 사람 같다" 등의 후기도 올라왔다. 달봉이의 무대 훈련을 맡은 이찬종(43) 이삭애견훈련소 소장은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선 애니보다 점점 노래를 크게 불러서 걱정했을 정도"라고 했다.

뮤지컬 ‘애니’ 공연이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앞에서 이찬종 소장이 달봉이의 앞발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1976년 초연된 브로드웨이 고전 뮤지컬 '애니'는 붉은 곱슬머리의 고아 소녀 '애니'가 부모를 찾아 나서던 중 억만장자 '워벅스'를 만나 행복을 찾는 과정을 그린 작품. 국내에선 2006년 초연됐고, 작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40주년을 기념해 다시 관객을 만났다. 극 중 고아원을 나와 헤매던 애니는 빈민가에서 우연히 떠돌이 개를 만나 '샌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가 된다. 국내 대표적인 동물행동전문가로 꼽히는 이 소장은 과거 서울시뮤지컬단의 '오즈의 마법사' 출연견을 훈련시킨 인연으로 이번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이 소장은 "달봉이를 위해 직접 옷을 만들어 보내주는 팬도 있었고, 달봉이를 위한 '퇴근길'(공연 후 퇴근하는 배우와 팬들이 만나는 시간)도 자주 생겼다"며 웃었다.

그동안 샌디 역할은 12개월 이상 된 온순한 대형견이 맡아왔다. 2006~2007년엔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키우던 골든레트리버 '쵸이'가 출연했고, 2010년엔 안내견 출신 래브라도레트리버 '구름이'가, 2011년은 뉴펀들랜드 '벤'이 출연했다. 달봉이는 지난 9월 김유경 '애니' 제작감독이 지인의 소개를 받아 캐스팅한 뒤, 한 달간 적응 훈련을 거쳐 무대에 서게 됐다. 이 소장은 "가장 중점을 둔 건 아역 배우와 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매일같이 연습실에서 뒹굴며 놀게 하고, 그러면서도 아이라 얕보지 않게끔 통제하는 훈련을 반복했어요. 그러다 보니 아역 배우들과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답니다."

국내 뮤지컬 작품 중 개가 출연한 경우는 손에 꼽힌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실수를 하거나 집중력이 떨어져도 중단할 수 없어 적합한 개를 찾아 훈련하는 것이 어렵다. 드라마 '최고의 이혼', 영화 '장산범' 등에서도 출연견 훈련을 맡은 이 소장 역시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어리지만 워낙 예의가 바르고 스트레스에 강한 성격이라 공연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달봉이를 통해 '애니'가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