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대형 마트. 노철민(18)군이 과자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일이 많은 연말을 맞아 이날 하루 고용된 일용직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상자를 옮기는 손놀림이 빨랐다. 노군은 "마트·편의점 대여섯 곳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고 했다.
노군은 1년 전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북에서는 황해북도 장풍군에서 민경(민사행정경찰)으로 근무했다. 선임병 구타를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작년 12월 20일 새벽 2시 혼자 새벽 근무를 하던 틈을 노려 휴전선을 넘었다. 노군은 "지뢰밭을 지나 남한군 경계 초소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남한군을 부르고 나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탈북민 교육 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서울 강북구의 한 종교 시설에 보내졌다. 탈북민 정착을 돕는 남북하나재단은 '무연고 미성년자'인 노군에게 시설에 머물며 정착 교육을 받으라고 권했다. 노군은 미성년자여서 만 19세가 돼야 정착 지원금 4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지난 5월 노군은 가방 하나만 들고 시설에서 나왔다. "직접 생활비를 벌어야 남쪽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가방에는 청바지와 티셔츠, 속옷 세 벌이 들어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 모텔에 한 달치 방값 35만원을 내고, 근처 생선구이집에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했다. 가게 주인은 노군 사연을 듣고 서빙을 맡겼다. 식당 일은 이틀 만에 그만뒀다. 노군은 "일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계속 혼나기만 했다"고 했다. 탈북단체 관계자는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미리 자본주의를 경험하지만 노군처럼 휴전선을 넘은 경우 적응이 더 힘들다"고 했다.
노군은 지난 7개월 동안 모텔 6곳을 전전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자리를 구할 때도 주소가 분명하지 않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노군의 수입은 한 달 80만~90만원 정도다. 매달 정부에서 60만원을 받고,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해서 20만~30만원씩 번다. 이 중 30만원 내외를 방값으로 내고, 휴대전화 요금을 치르면 식비가 부족할 때도 있다고 한다. 노군은 "힘들 때는 '내가 북에 있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특히 '가족을 버리고 남쪽으로 온 나는 악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노군은 "한국서 돈 벌기는 쉽지 않지만 늘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다"고 했다. "주변 식당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 분, 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택시비를 절반으로 깎아 주신 택시 기사님도 있었다"고 했다. 이날 일한 마트 일자리도 우연히 소개받았다. 노군은 "얼마 전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데 계산대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내 말투를 듣고 '탈북자냐'며 사정을 물어보시더니 '근처 마트에 자리가 있는데 일해보겠느냐'고 해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탈북민 단체인 '새터민라운지'의 이웅길 대표는 "철민이가 탈북 초반에는 기가 죽어서 주변에 일자리를 구해 달라는 이야기도 못 했지만 최근에는 다른 탈북민들이 '힘을 내야 가족도 다시 볼 수 있다'고 응원해줘서 표정이 밝아졌다"고 했다.
노군은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은 시간에는 수학과 영어 공부를 한다. 모르는 부분은 EBS 무료강의를 참고한다. 지금 실력은 고1 정도라고 했다. 대학을 나온 다음에는 식당을 차릴 생각이라고 했다. 빨리 돈을 벌어서 북에 있는 가족을 돕는 게 그다음 목표다.
지난 20일은 탈북 1주년이었다. 노군은 "정신없이 살다 보니 잊고 지나갔다"고 했다. "매달 5만~10만원씩 저축한 돈으로 얼마 전 백화점에 가서 코트를 샀는데, 이걸로 기념한 셈 치죠."
노군은 소셜미디어 계정에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詩)를 올렸다. 지하철 2호선 스크린도어에 적혀 있던 글이다. 시는 '수고했다. 삐끗하고 넘어지면서도 포기 않고 계속 걸어줘서'로 끝난다. 노군은 "마치 나를 보라고 누가 만든 시 같았다"며 "한국에서 성공해 북한에 있는 부모님과 누이, 소식으로만 태어났다고 전해 들은 조카를 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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