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노인들은 제기동에 모인다. '노인들의 홍대'란다. 기자가 제기동 콜라텍과 종로3가 낙원동, 온양온천역까지 그들을 관찰했다. 100세 시대 초입의 노년 풍경이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지난 18일 오후 2시, 서울 동대문구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앞에 칠순이 넘은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파란 머플러에 고동색 가죽 가방, 금색 나비를 수놓은 코트 차림.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어쩐 일로 울고 계시냐"고 물으니 묵묵부답. 한참을 다독이니 입을 연다. "그이가 변심했어…."

"남편 말씀이신가요?" 하자 할머니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촌스럽기는! 내가 이 나이까지 남편 수발이나 들고 있어야겠어? 새 남자 만나서 팔자 고쳐야지!"

할머니 등 뒤로 노년의 연인들이 손을 잡고 지나갔다. '그이'는 누구일까. 할머니의 화끈한 자유 연애담이 궁금했다. 인근 한방 찻집으로 모시고 가 쌍화차 두 잔을 시켰다. 계란 노른자를 얹어줬다.

"저기 지하철역 앞 큰 건물 4층에 콜라텍이 하나 있어. 거기서 그 할배를 만났는데… 어찌나 신사답게 춤을 잘 추던지."

할머니의 '그이'는 경기도 포천에서 무공해 인삼을 재배하는 70대 남자였다. 농약 없이 재배하는 인삼이라 인기가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부유하고 매너 좋던 그는 지난 2년간 만난 할머니를 '쿨하게' 차버렸다. 새 여자로 갈아탔다는 것이다. 젊어서 에어로빅 강사였던 의정부 사는 여자였다. 이들은 모두 제기동역 앞 콜라텍에서 만났다. 노년 '인싸'들의 성지 제기동역은 '노인들의 홍대'였다(※인싸: '인사이더'의 줄임말로 아웃사이더와 다르게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

우리의 낮은 당신의 밤보다 아름답다

할머니를 따라 그 콜라텍에 갔다. 의료기기 상점과 한약재 가게를 지나 지하철역 근처 큰 건물의 4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70대 남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허름한 간판엔 '미도파 웰빙텍'이라고 쓰여 있었다.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낮 시간대 성업하는 이 별종 클럽은 연령대만 맞으면 '입뺀(입장 금지)'이 없다. 입장료는 단돈 1000원. 코트 보관료로 500원을 받았다. 홀에는 가벼운 몸으로 홀가분하게 들어가야 한다.

캐럴이 섞인 뽕짝 음악이 흘러나왔다. 카운터 안쪽 벤치엔 눈 맞은 남녀가 삼삼오오 대화 중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댄스홀이 나온다. 드디어 입장. 홀 입구는 '난스텝(지루박과 달리 신문지 두세 장 크기에서 아기자기하게 스텝을 밟는 춤)존'이다. 댄스 초보들이 천천히 리듬을 밟는다. 더 들어가니 70평(230㎡) 남짓한 공간에서 능숙한 몸짓을 뽐내는 커플들이 보였다. 홀 안쪽 끝에선 DJ가 분주하게 곡을 고른다. 어두컴컴한 천장엔 네온등이 반짝거리고 커플들은 그윽하게 무드를 잡는다. 리듬은 리듬이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들 무리한 동작은 삼가면서 느리고 단조롭게 몸을 흔든다. 간혹 지르박과 탱고가 섞인 춤을 추며 신바람 난 커플들도 보인다. 너른 홀에 40여 쌍이 제각각 밀애를 즐기고 있었다.

홀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마련된 벤치. 커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외로이 앉아 있다. 이곳도 홍대 클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모나 행색, 춤 실력이 좋아야 인기를 끈다. 무도학원에서 월 30만~35만원을 내고 강습을 받는 사람도 있단다. 콜라텍에서 직접 연결해주는 전문 강사가 있을 정도로 수요가 꾸준한 편이다. 지르박, 탱고를 전문으로 가르친다는 한 강사는 "제기동 근처에 살며 강습이 있을 때마다 콜라텍으로 출근한다"고 말했다.

새 음악이 흘러나오자 춤추던 이들은 간간이 파트너의 손을 놓고 새 짝을 찾아 헤맨다. 부드럽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백발 성성한 남자, 코트 깃을 세우고 바람을 가르며 나타난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 박력 있게 다가와 손을 잡아끄는 남자…. 파트너에게 거절당하면 혼자 구석에 앉았다가 다시 새로운 이성을 향해 구애(求愛)에 나선다. 춤을 추던 한 노인은 "파트너의 손을 달걀 쥐듯 가볍게 쥐고 상대의 리듬에 맞춰 잘 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연이은 호흡으로 파트너와 친밀해지면 바로 옆에 연결된 매점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생강차, 대추차를 홀짝이며 '2차'를 모의한다.

오후 6시 제기동 클럽이 문을 닫으면 이들은 어디로 갈까. 일부는 퇴근 인파와 함께 전철을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일부는 종로3가 낙원동으로 이동해 술을 마신다. 탑골공원 뒤에 즐비한 모텔로 향하는 커플도 있다고 했다.

완성형은 따로 있다. 1호선을 타고 끝도 없이 대화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 "집이 어디세요?" "여기 자주 오세요?"로 불꽃이 튀고, 말을 트고, '라뽀(rapport·친밀감)'를 만들고, 나이 한탄에 자식 욕까지 섞어 구수하게 풀다 보면 어느새 온양온천에 도착한다. 이렇게 70대의 로맨스는 1호선에서 뜨끈하게 꽃을 피운다.

"집에서 최대한 먼 데로 가서 노는 게 좋지. 자식들이 볼까 봐…."

노년층 놀이문화의 핵심은 '원정 유흥'이다. 제기동역이 종로보다 낮 유흥 중심지로 주목받는 것도 도심 한복판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놀러 오는 70~80대 태반은 안양, 수원, 동두천, 남양주, 천안 등지에서 새벽부터 출정해 이곳에 집결한다. 콜라텍 관계자는 "제기동·청량리 콜라텍 한 곳당 많을 땐 하루 700~800명이 놀러 온다"며 "이런 콜라텍이 제기동에만 어림잡아 8~9곳"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본지 기자가 방문한 서울 제기동 콜라텍 풍경. ‘콜라텍’은 콜라와 디스코텍의 합성어로 1990년대 주류 대신 콜라를 판매하던 청소년 클럽에서 유래했다.

콜라텍에서 '몰링' 현상도

"어르신들 유흥으론 홍대 거리 뺨칠 정도예요. 그런데 또 장사는 잘 안 돼 걱정입니다."

제기동역 3번 출구에서 '진주미용실'을 운영하는 박수남씨는 여기에 20년 산 터줏대감이다. 박씨는 "이곳이 노인 유흥문화의 메카로 떠오른 이후 상권은 반대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이 동네의 본질은 약령시로 알려진 '경동시장'. 20년 전부터 한약재를 팔던 가게들은 아직도 건강보조식품 등을 팔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근 주택가와 상점가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 박씨는 콜라텍 때문에 제기동역 일대 인구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젊은 층이 점점 빠져나가는 게 원인이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밀려오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사이에만 반짝 붐비는데, 다들 콜라텍으로 쏙 들어가버리니까 상권은 죽고. 오후 6시 이후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않는 한산한 거리가 돼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천원 마트(1000원짜리 물건을 파는 상점), 아웃렛, 의류 재고 처리점, 국숫집뿐이라고 했다. 콜라텍 내부에 커피숍, 마사지방, 기원, 식당, 가요무대까지 다 갖추고 있어 손님들이 굳이 밖에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 이 건물 경비원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한곳에 모든 시설을 다 갖춘 덕에 콜라텍 건물에선 일종의 '몰링(malling)'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추위를 피해 콜라텍에 들어왔다는 박모(여·76)씨는 "1000원 내고 들어와 사람도 만나고, 밥도 먹고, 종일 놀 수 있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라고 극찬했다. 경기도 구리에서 매일 제기동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는 문모(79)씨가 말했다. "여기선 이성을 만나는 것부터 데이트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어요. 이런 게 진정한 노인 복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