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생각보다 작았다. 2010년 정문홍이 로드FC를 만들었을 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국내에선 격투 산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불가능은 뒷이야기나 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난 8년간 대회를 51번 치렀고 국내외에 1000여개의 로드FC 체육관을 열었다. 선수들은 은퇴 후 체육관에서 일하며 진로 고민을 덜었다.

이 사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꺼낸 적이 없다. 뚜벅뚜벅 직진에는 익숙했지만 겪어온 삶을 되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세상이 그를 부르는 대로 내버려뒀다.

정문홍(44)은 8년 전 '로드FC'란 종합격투기 단체를 만들었고, 이를 아시아에서 손꼽는 단체로 키웠다. 종합격투기는 지금 거대 산업이다. 지난해 종합격투기 스타 코너 맥그리거와 복싱 스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의 대결에서만 1조원이 오갔다.

정문홍은 한국과 일본, 중국 등에서 51번의 공식 로드FC 대회를 열어 2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대전료, 규모, 관객 수 등에서 국내엔 이미 적수가 없다. 로드FC의 중국 법인은 중국 최대 민간 투자사인 중국민생투자로부터 200여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중국 투자사들은 로드FC의 중국법인 가치를 4000억원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 스포츠로는 처음으로 국영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됐고 베이징대엔 필수 체육과목 중 하나로 '로드 격투학'이 만들어졌다. 무(武)를 숭상하는 중국이 '격투 한류'에 열광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는 소문뿐이었다. 조폭 출신이라거나 막대한 부를 상속받아 쉽게 성공을 이룬 인물 운운하는. 포털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 학력과 같은 정보도 알려진 것이 없었다.

첫 인터뷰 요청은 10월.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나 같은 사람은 얘깃거리가 안 된다며. 11월 이른 한파가 찾아왔을 때 그가 있다는 대전을 무작정 찾았지만 헛걸음이었다. 그 전후로 다섯 번 넘는 요청 끝에 12월 중순에야 그가 응답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신사가 다가와 인사했다. 손이 생각보다 작았다.

정문홍은 격투기다

―평소 옷차림인가.

"운동하고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땐 트레이닝복만 입는다. 격투기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래서 바깥사람을 만날 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종합격투기의 이미지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일이 부담스러운가.

"책임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8년 전 로드FC를 만들었을 땐 스포츠 대접을 못 받았다. 선수들 컨디션 조절을 위해 호텔에 묵게 해주려고 갔더니 투숙을 거절하더라. 돈을 더 준대도 안 된다고 했다. 문신 있고 싸움하는 친구들을 받으면 다른 고객들이 불편해한다는 거다. 하나부터 열까지 종합격투기에 대해 바꿔야 할 것이 많았다. 그게 내 역할이다."

종합격투기 선수 출신인 정문홍은 매일 치악산에 오른다. 운동할 때는 잡념이 없어져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된다고 했다.

―너무 '보스'적 사고 아닌가.

"함께 운동해 온 선후배들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은 있다. 그러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생각은 없다. 우리 회사 식구 누구도 나와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다. 중간 관리자도 없다. 지위보다는 소통과 능력을 중요시한다. 로드FC의 대표직도 작년에 내려놨다. 현재는 중국 등 해외 관련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책임진다는 말, 쉽게 할 수 있을까.

"종합격투기 케이지(cage) 안에는 두 사람만 선다. 상대가 있으니 승부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건방지다고 해도 좋다. 격투기와 그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해 최고로 열심히 살았다. 20~30대 직업을 서너 개씩 갖고 살 때도, 하루하루 끔찍한 운동을 할 때도, 단체를 만들고 대표직을 맡으면서도 내가 무너지면 모두 무너진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격투기가 삶의 중심이 된 까닭은.

"운동을 제일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기도 했고. 케이지 위에선 공평하다. 노력과 노력이 부딪쳐 승부가 갈린다. 솔직하다고 할까, 거짓말을 안 하니까."

―격투 단체를 만든 이유는.

"코리안 드림. 제자들과 후배들이 영원히 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격투기에도 암흑기가 있었다. 2007년 일본 최고의 격투기 단체 '프라이드'가 무너지면서 국내 업체들도 연거푸 쓰러졌다. 뛸 무대 자체가 사라졌다. 해외 무대가 있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엑스트라 신세였다. 시합을 뛰기 위해 선수가 매달려야 했다. 지금은 우리 단체에서 뛰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을 찾는다. 누구나 챔피언이 될 수 있다. 꿈을 찾아 우리를 찾는다. 이런 말이 가능할 정도로 자생력 있는 단체가 됐다."

가난을 향한 펀치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삼갔지만, 격투기나 로드FC에 대한 비판에는 스스럼없이 목소리를 냈다. '한국 언론은 한국 종합격투기의 성공이 싫은가보다. 맘대로 하라'는 식의 말을 해 스포츠 언론 등과도 척을 졌다. 국내 격투기 발전에 공을 인정받으면서도 트러블 메이커로 구설에 올랐다.

―오너의 성향도 기업을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선수들을 보호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아래 앞서간 부분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더라. 어릴 적 부유하게 큰 이들은 좀 더 세련된 태도를 갖춘 경우가 많다. 적당하게 겸손하고 적절하게 소신 있고. 그런데 나는 조절이 잘 안 된다. 방어기제랄까.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일단 반박하는 나 자신을 본다."

그의 고향은 원주.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막내아들이었다고 했다. 갓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쉰, 어머니는 마흔 살. 어머니는 시장에서 행상을 했고 그가 기억하는 시절의 아버지는 직업이 없었다. 매일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게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동대문에서 1000원에 10켤레 하는 양말을 떼어와 동네 시장에서 팔았다. 자정쯤 원주에서 청량리 가는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동대문에 도착해 양말을 사러 다녔다. 그 노인이 자기 몸만 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따라다녔다.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 장사를 도왔다."

그에게 가난은 비참의 동의어였다. 억만금을 주고 젊음을 돌려준 대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가난이 콤플렉스인가.

"원주에 큰 갈빗집이 하나 있었다. 그 주인이 마당에 개를 주라고 사람들이 뜯다 남긴 갈빗대 몇 개를 까만 봉지에 싸서 내놓곤 했다. 어느 겨울, 장사가 끝난 뒤 돌아가다 정말 개를 주기 위해 그 봉지를 집어 들었는데, 갈비 냄새가 솔솔 올라오더라. 좀 뒤져보니 손님들이 안 먹은 성한 것이 잡히더라. 빼서 먹었다. 어머니는 가는 내내 먹는 모습을 지켜볼 뿐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 부모가 되고 나서 알았다. 그 당시 어머니 마음의 비참함을. 다시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가난을 동기 부여로 여긴다.

"그런 건 결과론이고 책에서나 하는 말이다. 가난이 앗아간 게 너무 많다. 두 형이 있었는데 한 명은 넝마를 줍다 객사했고 작은형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아픔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20대엔 항상 직업이 서너 개는 됐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는 야간 공사장에서 철거 일을 했다. 합격한 강원대학교를 휴학하고 90만원짜리 중고 봉고차를 사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옷가지를 팔았다. "장터에선 자리 잡기 경쟁이 치열했다. 도로까지 밀려나고 아주머니들에게 빗자루로 매 맞고 쫓겨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봉고차를 발로 차고 하늘에 대고 욕도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장돌뱅이같이 사는 게 창피했던 것 같다. 또래라도 오면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으니까. 마음 한편에 누군가 이 상황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이만큼 고생했으니 구원의 손길이 와 찌그러진 차도 펴주고 옷가지도 치워주는 그런 꿈. 그런데 어디 삶이 그런가."

그럴 때 눈에 들어온 게 아주머니들이 장터 옆에 세워 둔 빗자루였다. "그분들도 사실은 가족의 밥줄을 지키려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도 알고 그 사람들도 알았다. 그런데 나만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이후 장터 한복판에서 백덤블링을 하고 재주를 넘으면서 사람을 끌었고, 그렇게 장사를 했다. 화장품, 고깃집, 휴대폰 가게, 건설 시행사 등 손대는 일마다 잘 풀렸다.

지난 10월 원주 로드FC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제자들과 찍은 사진.

조폭이냐 재벌이냐

그렇게 모은 돈은 로드FC를 만드는 종잣돈이 됐다. "로드FC의 국내 경기에 드는 비용은 5억원가량. 해외에선 3~4배의 돈이 든다. 지금이야 후원사라도 있지만 초반엔 없었다. 악착같이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시작한 단체다."

장사로 모은 돈으로 그런 큰 비즈니스가 가능할까. 물려받은 자산만 1500억원가량의 재벌 2세라거나 조폭과의 연루설이 나온 것도 비슷한 이유다. 질문이 나오자마자 헛웃음을 지었다. "열심히만 하면, 거리에서 어묵·붕어빵 팔아도 큰 수익이 난다. 옷가지, 화장품 장사로 이어지면서 10억원 넘는 돈을 모았다. 은연중에 그런 일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쳐다도 안 보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할 일이 굉장히 많다. 일의 귀천만 두지 않으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번 돈이 아깝진 않던가.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주위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알고 있다. 내 돈이 애먼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종합격투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지 않았나. 아깝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못 했을 것이다."

―연예인, 예쁘장한 여성 선수로 서커스 매치를 벌여 되레 해가 된다는 비판도 있다.

"격투기를 스포츠로 보는 인식이 약한 상황에서 대중의 눈을 잡는 게 쉽지만은 않다. 수백명의 젊은 선수가 뛸 무대를 지키려면 국민의 관심을 끌 경기가 필요한 것도 현실이다. 일부분 공감하는 지적이기도 하다."

선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

정문홍은 최근 '원주 아저씨'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학교 폭력 가해자, 피해자 청소년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그에게 상담을 청한다고 한다. 싸움 좀 할 것 같으니 나 좀 도와달라거나, 매일 치고받다 보니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식의 하소연들. 4년 전 그가 소셜 미디어에 학교 폭력을 얘기하며 '누구든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찾아와라. 도와주겠다'는 메시지를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그가 대화를 위해 만난 아이들이 100여 명 된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후배들의 모습도 본다. 외면할 수가 없다. 공짜로 운동시키는 아이만 수십 명이다."

김수철(왼쪽) 전 로드FC 밴텀급 챔피언은 중학교 때부터 정문홍의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다. 체육관비를 내지 못할 만큼 가난했고 불안 장애 탓에 집중도 못 했다. 정문홍은 그의 모습에서 어릴 적 자신을 봤다. 역경을 딛고 챔피언이 된 김수철을 제자 중에 가장 아낀다고 했다.

체육관에는 그가 '외면하지 못한' 후배가 가득했다. 로드FC 챔피언이 된 김수철도 그중 하나다. 중학생 때부터 정문홍의 체육관에서 운동한 김수철은 체육관비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불안장애도 있어 집중도 잘하지 못했다. "주위에서 내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딱 내 인생이더라. 그들이 지금 운동이든 삶이든 한 치 오차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산다."

―누군가를 돕는 것과 사업이란 단어는 물과 기름 아닌가.

"선한 회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선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한 시스템이라니.

"더 많은 수익을 내고 이를 직원과 선수들에게 더 많이 돌려주는 구조다. 쉬워 보이지만 오너 입장이 되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직원들에게 한 달씩 유급 휴가를 준다. 대기업에 비해선 부족하겠지만 국내 대회는 이윤을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을 직원 월급, 선수들의 대전료로 쓴다. 선한 사람이 선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대표직도 사임했다."

지난해 말 스스로 대표직을 내려놓은 그는 유명 격투 해설가이기도 한 김대환에게 대표직을 맡겼다. "김 대표는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다. 선한 사람과 선한 시스템의 순환, 그 점에서 나보다 김 대표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김 대표가 실패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해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버거운 상대에게 도전해 지고 울면서 배우는 게 격투기라고 가르쳤다. 지금까지 지고 울면서 여기까지 왔다. 세계 최고의 격투기 단체는 미국의 'UFC'. 6조원가량의 가치로 평가된다. 정문홍의 꿈은 세계 최고의 격투기 단체. 아직 지고 울고 배울 준비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