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베네수엘라인이 넘고 돈은 유튜버가 번다. 올해 물가상승률만 130만%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 상황에 놓인 베네수엘라인들이 단돈 5달러(약 5600원)에 유튜버들의 엽기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 소스’를 자청하고 있다.
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Vox)는 재능공유 플랫폼 파이버(Fiverr)의 ‘장난과 스턴트(Pranks&Stunts)’ 섹션을 소개하며 한가지 특이한 점을 꼬집었다. 돈을 받고 대신 굴욕적인 장난을 당하거나 엽기 행각을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이들 중 다수가 바로 베네수엘라 출신이라는 점이다.
Vox는 "유튜브에서 '액체괴물 뒤집어쓰기'와 같은 엽기 영상이 인기를 끌자 유튜버들이 조회수·구독자수를 늘리려고 '엽기적 장난 동영상'까지 외주를 주기 시작했고, 초인플레이션 때문에 본업으로 버는 돈이 쓸모없어진 베네수엘라인들이 생존을 위해 달러를 벌고자 이에 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벳시(22)다. 벳시는 파이버에 올린 소개글에 "당신의 재미난 유튜브 채널을 위해 모든 장난을 대신 당해드립니다"고 썼다. 얼굴에 분홍색 액체괴물을 잔뜩 뒤집어쓴 사진도 함께다.
벳시는 낮에는 치과의사로 일하지만 부업으로 파이버에서 장난 동영상을 의뢰 받아 짭짤한 부수입을 올린다. 벳시는 Vox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장난 동영상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치과의사로 일해 버는 돈보다 더 많다"고 털어놨다. Vox는 이 인터뷰 역시 6달러를 지불해 성사됐다고 밝혔다.
역대 최악의 경제위기로 베네수엘라는 올해에만 물가상승률이 130만%를 넘어섰다. 대통령이 월급으로 300만볼리바르를 받지만 이 돈으로는 통조림 한 캔도 살 수 없다. 가디언에 따르면 수도 카라카스에서 닭 한 마리를 사려면 1460만볼리바르가 있어야 한다.
미국 달러가 대가로 지불되는 파이버 서비스같은 샛길을 통해 어떻게든 부수입을 마련하지 못하면 말그대로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대신 장난당하기’뿐 아니라 그래픽, 번역, 녹음 등 온갖 종류의 일을 대신 해주겠다는 베네수엘라인들이 넘쳐난다.
한 베네수엘라 남성은 파이버 경험담 게시판에 자신이 프리랜서 서비스에 지원한 이유를 설명하며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고, 어떤 누구도 더이상 본업으로 먹고 살 수 없어 누구나 새롭게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썼다.
유튜브에 ‘파이버 반응(Fiverr Reaction)’을 검색하면 ‘돈주고 모르는 사람한테 이상한 짓 시키기’와 비슷한 제목의 영상이 수백개가 나열된다. 자신이 돈을 지불한 이에게 끈적이는 젤리를 온 몸에 뒤집어 쓰거나 머리에 직접 달걀을 깨고, 케익에 얼굴을 파묻으라고 시킨 뒤 경악하는 반응을 보여주는 식이다. 일부 유튜버들이 자극적인 영상으로 인기를 끌자 수입 확대를 노린 다른 이들도 너나없이 짓궂은 장난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베네수엘라 사용자는 "간단한 요청이 많지만 재료값이 많이 들어가거나 난이도가 높은 요청일수록 금액도 올라간다"면서 "받는 돈은 한 영상에 5~50달러로 다양하다"고 말했다.
물론 이를 악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장난 동영상 제공 서비스를 "돈만 주면 뭐든 다 해준다"라는 뜻으로 곡해한 악성 고객들이 변태적이거나 악의에 가득찬 요청을 하는 것이다. 벳시는 "자신의 성적 도착을 만족하기 위해 발만 나오는 영상을 찍어 보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며 "일정선을 넘어서는 요청은 모두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Vox는 이를 두고 "다른 사람이 돈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악취미"라고 했다.
IMF는 내년 베네수엘라 물가 상승률이 1000만%에 달할 것이라 예측한 바 있다. 긱 이코노미(빠른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비정규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는 경제 현상)와 한 나라의 경제 파탄이 만나 빚어낸 ‘현대판 광대짓’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 베네수엘라 남성은 "미화 5달러는 베네수엘라에서 6명이 식당에서 한끼 밥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다. 파이버는 내게 기회다"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