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백악관에 초청된 아시아계 디자이너가 몇이나 될까요? 저희 고모부(지미 추)가 영국 켄싱턴궁을 방문해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구두를 만들었을 때, 더 이상의 영광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게 최근 인기 영화로 화제였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라는 건가 봐요! 부유하다는 '리치(rich)'가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를 흡수해 생각이 '풍성(richness)'해진다는 것이오!"

세계적인 구두·액세서리 브랜드 '지미추'(Jimmy Choo)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샌드라 초이(Choi·46)가 최근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중국계 영국인인 그는 방한 소감을 묻자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자동차 문을 열고 홀로 우리 매장으로 걸어들어올 때의 기분이 이랬을지도 모르겠네요"라며 "한국은 정말 신비로우면서도 설레는 곳"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을 찾은 구두 브랜드 지미추의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샌드라 초이가 자신이 디자인해 내놓은 가방과 신발 컬렉션 앞에 나섰다.

지미추는 말레이시아계 구두 디자이너 지미 추(70)가 지난 1986년 영국 이스트엔드에서 이름도 없는 작은 매장을 연 것이 모태가 됐다. 말레이시아 구두 장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지미 추의 섬세한 손놀림은 영국 패션계를 금세 사로잡았다. 1990년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직접 매장을 찾았을 때 그녀를 처음 맞은 이가 샌드라 초이었다. 지미추 아내의 조카인 샌드라는 1989년부터 지미추의 '1호 직원'이자 '총괄 디자이너'로 일했다. "주차 금지구역에서 어느 훤칠한 여성이 차에서 내리는 거예요. 제대로 앉을 데도 없는 작은 공간인데도 구두가 멋있다고 칭찬해주더라고요. 그 뒤 고모부는 7년간 다이애나의 전속 디자이너 역할을 했지요."

1996년엔 정식으로 '지미추'란 브랜드를 열었다. '왕실 디자이너' 명성은 빠르게 대서양을 건넜다. 1998년부터 6년간 방송된 미국 인기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이 '오 나의 지미추'라며 열광했고, 전 세계 지미추 매장에 '솔드 아웃'(매진)이란 팻말이 내걸렸다.

왼쪽부터 1996년 미국 시카고 방문 갈라쇼에서 지미추 구두를 신은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지미추를 신고 등장한 미셸 오바마. 지난 10월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 지미추를 신고 방문한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

지난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취임식 때 부인 미셸이 선택한 신발도 지미추였다. 2015년 영국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이 둘째를 출산한 뒤 병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당시 그녀의 큰 키를 더 높인 하이힐도 지미추였다. 앤젤리나 졸리를 비롯한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의 레드 카펫 위에서도 자주 포착된다. 최근 인기를 끈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주인공 제마 챈도 모든 행사에 지미추 구두를 동반했다.

영국 패션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다니다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박차고 나온 샌드라 초이의 당돌함은 지미추를 구두에서 가방, 주얼리, 향수 등으로 확장하는 진취적 에너지로 승화됐다. "예술가가 되고 싶어 엄한 부모님 곁을 떠나 가출까지 감행했어요. 드라마에선 저희를 '꿈의 구두'라고 지칭했지만, 저희를 찾아준 모든 여성 덕분에 제가 계속 꿈꿀 수 있었습니다."

정작 창업 디자이너 지미 추는 2001년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지미추 브랜드의 명성은 멈추지 않았다. 3년 전엔 미셸 오바마가 지미추 팬이라며 샌드라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디자이너를 꿈꾸지만 아름다운 옷과 구두를 만져볼 삶의 여유가 없는 취약 계층 학생 수십 명과 함께 초청됐어요. 저희와 워크숍을 진행했지요. 미셸에게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을 넘어, 꿈을 디자인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샌드라는 집에 있는 800여 켤레의 구두 컬렉션을 볼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린다고 했다. "모두가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기를!" 서울의 낯선 풍경을 한참 구경하던 그는 디자이너를 꿈꾸며 집을 박차고 나왔을 때의 기분이라며 연필을 꺼내 구두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