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1888~1897

제임스 S. 게일 지음|최재형 옮김|책비|340쪽|1만8000원

캐나다 출신 미국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1863~1937)은 스물다섯 살 때인 1888년 동양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했다.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후 6년이 지난 때였다. 젊은 선교사는 서울에만 머물지 않고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부산·제물포·대구·원산·개성·해주·평양·의주 등 한반도 남북과 조선인이 많이 사는 랴오양·선양·퉁화 등 만주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는 조선 입국 10년째인 1898년 미국에서 '코리안 스케치(Korean Sketches)'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10년간 겪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기록이다.

열정 넘치는 선교사가 기록한 10년 기간은 이 오랜 나라의 마지막 시기였다. 500년 지속한 조선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글을 마무리한 시점은 1896년 봄 이후부터 1897년 가을 이전 어느 시기일 것이다. 책에는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기록은 있지만 대한제국 선포 관련 서술은 없다.

조선 사람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다. "외국인이 조선 땅에 들어온 지 10년도 더 되었는데, 그 10년 동안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와중에도 모든 외국인이 극진한 예로써 대접받았을 뿐, 유럽인이든 미국인이든 그 누구도 해를 입거나 협박당한 경우가 없었다" "잔인한 인종이지는 않을까 하고 상상해오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사람들은 어진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이렇게 낙후된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토록 현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상놈'(평민)에 대해 깊은 애정을 나타낸다. 게일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엄청난 부담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지만 상놈들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도시의 성문과 골목 구석구석을 빛내는 보석이다. 난 상놈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여행 길잡이인) 까만 얼굴의 왜소한 '상놈'은 나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고, 자신의 안위는 팽개친 채 눈과 빗속에서도 굳게 버텼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던 것일까? 돈 몇 푼 때문에? 그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우정과 명예의 문제였던 것이다."

안경을 쓴 원님(가운데)과 포졸들. 당시 양반은 어두운 색깔 안경을 비싼 값에 사서 마련했다. 아래 사진은 평양 대동문 모습.

'상놈'들은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동해안 여행 때였다. 돈이 떨어졌다. 게일은 100달러를 보내라고 서울에 전보를 쳤다. 사흘 후 어느 '상놈'이 찾아와 종이로 둘둘 감싼 100달러를 내밀었다. 서울에서 300㎞ 떨어진 곳이었다. 하루 100㎞씩 달려온 것이다. 심부름 값은 1달러도 안 되는 돈이었다. 게일은 "100달러면 몇 년은 먹고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왜 그는 도망가버리지도, 강도를 당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은 걸까? 그것은 그가 신의를 알고 덕을 행하는 진정한 남자였기 때문"이라며 "8년간 내가 고용하고 있는 젊은이는 단 한 번도 나를 속이거나 실망시킨 적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사람보다 낫다는 게 내 진심이다"라고 적었다.

반면 양반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한다. "생활 속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직접 하는 것이 없다 보니, 손은 비단 같았고 손톱은 길게 자라 있었다. 또 항상 앉아만 있어서 그 뼈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했고, 중년이 되기도 전에 연체동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백성이 사는 곳은 "낮은 흙벽을 짚으로 덮은 초가"인 반면 양반들은 "옷이나 유흥 같은 물질적 즐거움을 추구했는데 조선에는 이러한 종류의 양반들이 엄청나게 흔했다"면서 "(양반들은) 실체가 아닌 겉치레가 삶의 목적이 되고 있었다"고 적었다.

군주는 무력했다. 고종은 민비(명성왕후) 시해 직후인 1895년 10월 8일 미국 무관(武官) 등과 입궐한 게일 일행 앞에서 "일본인이 왕후를 죽였다. 복수를 하는 자에게는 내 머리칼이라도 잘라 신을 삼아 주겠다"며 울었다. 미국·영국·러시아는 최대한 유감을 표명할 뿐이었다. 궐문은 일본군이 지키고 있었다.

건국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망국의 양상은 다 비슷하다.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층 때문에 신의를 지키고 성실한 백성들이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조선은 이제 확실히 일본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갔다"고 진단한 120년 전 게일은 그러나 조선 백성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다음 시대가 밝아오면 이 땅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눈길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덕의 모범을 다른 사람들도 확실히 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