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골목길에 서 있는 알파고. “이슬람 신자로 한국에 살기는 불편하지만 종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장점”이라고 했다. 이름은 돌궐어로 ‘투구’라는 뜻이다.

알파고를 만나면 바둑을 한 판 두고 싶었다. 이름이 알파고(Alpago)인 사내는 우리말이 유창했다. 이세돌을 꺾은 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AlphaGo)와는 한 끗 차이다. 바둑은 둘 줄 모른다고 했다. "기원에 가서 알까기나 하자" 농을 던졌더니 "오목은 좀 하는데"라며 깔깔깔 웃었다.

알파고 시나씨(30)는 터키에서 과학고를 졸업했다. 거푸 월반(越班)해 동급생보다 두 살 어렸단다. 2004년 카이스트(KAIST)로 유학 오며 인생 항로가 달라졌다. 한국어부터 익혔고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올 초 서울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글로 쓴 논문 제목은 '한국의 5·16 쿠데타와 터키의 5·27 쿠데타 비교'다.

알파고는 최근 MBC 예능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해 이름값을 했다. 한국사를 맛깔 나게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는 반응이 많다. 터키 친구들을 덕수궁과 서대문형무소로 안내하면서 그는 말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굉장히 빨리 이루었어. 그 배경에는 적화통일에 대한 저항과 두려움, 나라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

지난달 24일 서울 대학로에서 알파고를 만났다. 운전면허 기능 시험에 떨어지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뜻밖에 표정이 밝았다. 5개 국어에 능한 그는 "한국어와 달리 일본어 능력 시험은 서너 번씩 재수하며 통과했다"며 "인생에는 실패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런 데서 맛보는 편이 낫다"고 했다.

"한국인은 코미디 소재"

알파고는 2010년 터키 대통령 방한 때 통역을 맡은 뒤 터키 '지한 통신사'에서 한국 특파원으로 일했다. 지한은 2016년 쿠데타로 강제 해산됐다. 그는 기자이고 책을 쓰며 강연한다. 스탠드업 코미디, 방송도 하는 도전의 아이콘이다.

―'직업 수집가' 같은데 정체성 혼란은 없나요.

"누가 물으면 기자라고 답해요. 아시아기자협회 소속으로 온라인 잡지를 만듭니다. 해외에 있는 회원 기자들이 보내온 기사를 싣고 잡지 방향도 잡아주고요. 하는 일이 서로 다 연결되어 있어요."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오르면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한국 사람들 사는 모습 보며 웃기다고 생각한 부분을 포착해 들려줘요. 그들은 왜 호신술에 능한가? 묻고 설명하는 식이지요. 커피 주문하면 빨리 지갑 꺼내 값을 치러야 하잖아요. 선배님, 이건 제가 살게요. 어허, 어딜 감히!(웃음). 서로 팔을 잡고 다투다 호신술이 발달한 거라고요."

―예를 하나 더 들어주신다면.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가장 이해 못한 게 말뚝박기예요. 무대에 올라 말합니다. 너희 남자들, 왜 그러냐? 습하지 않아? 냄새 안 나? 하하하."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방송 타고 나서 바빠졌겠군요.

"알아보는 분이 늘었어요. 얼마 전엔 어떤 할아버지가 저를 붙잡고 '잠깐만. TV에서 본 사람이네. 이름이 뭐였더라. 알베르토?' 하셨어요(알베르토는 다른 출연자다). 친구를 초대한 호스트가 주목받곤 하는데 제 경우는 터키 친구들이 더 떴어요."

―좀 기다려봐요. 한국기원에서 전화 올지 몰라요. 홍보대사 맡아달라고.

"(반색하며) 그럼 너무 좋죠."

―과거로 가봅시다. 터키에 살 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랑질 하면서 허세 부리길 좋아했어요. 한국에서 성격을 고쳤어요. 겸손해야 하잖아요. 허세 부렸다가는 왕따 당해요. 제가 또 좀 욱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일찍 왔으니 망정이지, 그런 사람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잖아요. 참을 인(忍)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지요."

―어쩌다 한국까지 왔는지요.

"제가 진학한 이스탄불 기술대가 카이스트와 자매결연을 했어요. 한국 유학을 4년 다녀왔다는 터키 사람들 만났는데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밖에 모르더라고요. 그건 한국에 대한 모욕 아닌가요? 카이스트는 영어로 강의하지만 저는 오기 전부터 마음먹었어요.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로."

―전자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꿨는데.

"한국어가 재미있었어요. 터키어처럼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 어순도 같았고요. 과학 공부는 부모나 학교가 시켜서 했다면, 한국어 공부는 등 떠밀려 한 게 아니니 더 빠져들었지요. 학과 선택할 때 성적보다 흥미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대전 한남대 어학당에서 만난 유엔 군인들이 말했지요. 네가 정치를 전공하면 졸업하자마자 찾는 곳이 많을 거라고. 그래서 충남대 정외과로 옮겼어요."

알파고가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서울대 석사 논문.

한국·터키 쿠데타의 공통점과 차이점

낯선 한국어를 익히면서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알파고는 "한국 근현대사 공부가 흥미로웠다"며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꾼 셈"이라고 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던가요.

"보수가 바라보는 근현대사와 진보 눈에 비친 근현대사가 다르잖아요. 하늘과 땅 차이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태균 교수님 강의를 듣기 전까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분이 중립적으로 연구하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고 배울 게 많은 겁니다. 그래야 균형감도 생기고요."

―예를 들어주신다면.

"대통령마다 공과(功過)가 있잖아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쪽에서는 국부라고 칭송하고 저쪽에선 분단의 원흉이라고 욕합니다. 그럼 얻을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대통령이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구분하면서 공부에 매료됐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조갑제 기자와 서중석 교수는 각각 어떻게 썼는지 찾아 읽고 비교하며 내 생각을 만들어갔습니다. 논문도 그 방향으로 썼지요."

―1960년대 한국 5·16 쿠데타와 터키 5·27 쿠데타는 어떤 공통점이 있던가요.

"터지기 전에는 비슷해요. 정권은 무능했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트 집단이었던 장교들이 들고일어난 거예요."

―차이점은 뭡니까.

"군사혁명을 일으킨 뒤엔 판이해요. 터키에서는 2년가량 군부가 정권을 잡았다가 공화당에 넘겼어요. 권력을 더 오래 가져가자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이양하자는 쪽이 숙청했지요. 한국은 달랐어요. 정치권에 박정희 장군이 믿고 맡길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대체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요. 4·19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 무너뜨리고 이승만을 제거했을 거예요. 역사가 참 웃겨요. 두 대통령이 그런 사이인데 지금 와서는 마치 한편인 것 같고 선후배처럼 오해하고 있으니."

―한국에서 14년 살며 진보·보수 정권을 다 경험해보니 어떤가요.

"한국에선 보수와 진보 사이에 사상적 차이가 희박하다는 게 특징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녹색 에너지를 강조했고, 박근혜 정부 시절 이민자들이 국회에 입성했지요.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고요. 어느 쪽이 보수이고 진보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그게 장점이기도 해요."

―어째서죠?

"차이가 뚜렷하면 사회 통합이 어려울 테니까요. 한국 사회는 국익 문제에 있어선 굉장히 빨리 하나로 뭉칩니다. 보수와 진보가 가장 크게 갈라지는 건 북한 문제죠. 한국에서 정권은 시계추처럼 진보로 갔다 보수로 갔다 하지만, 양쪽에 고정된 유권자보다는 중립적인 유권자가 더 많습니다. 정치가 진화했다는 한 지표라고 저는 생각해요."

―근년 들어 한국이 겪는 정치 변화는 어떤가요.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보수 진영이 자기 혁신을 게을리해도 수월하게 정권을 잡을 것 같아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룰은 다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안보를 무시하지 않은 채 북한과 대화하고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에선 고래 싸움에 끼어들지 말아야죠. 강국이 되려면 국민을 빨리 국제화하는 게 중요하고요."

한국인에게는 경쟁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다. 나라 밖 도전을 꺼리는 이유가 된다. 알파고는 “독립운동가들이 도피가 아니라 더 강력하게 싸우러 밖으로 나갔듯이 관점을 바꿔야 한다”며 “강연할 때마다 도전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한국인의 완벽주의, 이해 안 돼"

알파고는 대학원에서 만난 한국인과 결혼했다. 9개월 된 아들도 있다. 햄버거도 안 파는 동남아 시골에도 삼성 광고판과 핸드폰은 들어가 있다. 알파고는 "기업과 국민 사이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와 국민 의식의 세계화 속도가 서로 맞지 않는 게 문제라고요?

"세계에서 대졸 청년 10명을 무작위로 뽑으면 한국인의 지식수준이 가장 높을 거예요. 그런데 죽어도 한국에서 취직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습니다. 서울대 강의하다 학생들에게 물었어요. 졸업하면 뭐 할 거냐? 석사 갑니다. 석사 끝나면? 박사 갑니다. 박사 끝나면? 교수 자리 알아봐야죠. 한국에 자리 없는데? 그럼 기다려야죠. (탁자를 쿵쿵 치며) 야, 북유럽 가. 동유럽 가. 남미 가. 중앙아시아 가. 더 우대받을 텐데 왜 꼭 여기서 교수를 해야 하니."

―왜 그럴까요.

"지식은 국제화됐는데 정신이 못 따라가는 거예요. 한국인은 뭐랄까 생활 농도가 너무 진해요. 김치 먹어야 하잖아요. 한국 떠나면 불편해져요. 임진왜란 때 고추가 들어와 맵게 먹은 역사는 길지 않는데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전쟁 후 최빈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급성장했지만 그때와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고달파요. 부모도, 자녀도 하루 15시간씩 일하고 공부하지요.

"자기가 좋아한다면 문제가 안 됩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소통하지 않고 억지로 일하니 불만이 쌓이지요. 한국은 또 지나치게 학문적인 사회예요."

―무슨 뜻인가요?

"공부를 학문적 의미로만 보면 재능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일이 됩니다. 청소년이 게임을 좋아한다면 그 분야를 파고드는 것도 공부예요. 장인어른이 지하철 기관사인데 그림 그리시는 걸 촬영해 유튜브에 올리려 하니 정색하셨어요. '내가 자격이 있나? 화실 선생님들이 보면 망신인데….' 제가 설득했어요. 이건 KBS가 아니고 아무나 올리는 유튜브 방송이라고. 가방끈 짧다는 게 장벽이 돼 도전을 가로막는 겁니다."

―장인이 뭐라고 부르나요. 알서방? 한국에 오래 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그냥 알파고라고 하세요. 외국인은 한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와요. 한국 드라마 보면 세탁소 딸이 대기업 3세랑 결혼하잖아요. 사기예요 사기. 백마 탄 왕자님 만나보자는 꿈을 꾸고 이 나라에 오는 외국 여성이 많아요. 오래 살아도 적응 안 되는 건 완벽주의입니다. 집사람과도 그것 때문에 가끔 다퉈요."

―완벽주의라뇨?

"저는 하고 싶으면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시작하고 봅니다. 카라반 아시나요? 낙타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가잖아요. 비유하자면 한국은 모든 낙타에 짐을 다 실어야 출발시키는 나라예요. 시행착오를 겪기 싫은 거죠. 말이 되나요?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걷기를 바라는 꼴입니다."

알파고는 재작년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책을 펴냈다. 여러 나라 화폐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자유·독립·민주주의에 기여한 영웅 중심으로 썼는데 한국 화폐에는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며 "보수·진보가 다 기억하고 싶어하는 독립운동가나 마라토너 손기정이 화폐에 있었다면 책에 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