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법원의 판결 이후 양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 법원 판결에 맞서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을 근거로 '개인 배상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아시아·아프리카를 식민 지배했던 유럽 국가들도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이전 식민·점령지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와 수탈, 강제 노역 등에 대한 사죄와 배상 요구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제국주의 피해국들에 대한 유럽 주요국의 구체적인 사과와 배상 내역을 짚어본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콩고인들 손목 잘라
1885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고무나무가 풍부했던 아프리카 중부 지역 추장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우고 주민들을 고무 채취에 내몰았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을 잘랐고, 가혹한 노동을 못 견디고 도망가면 인질로 잡은 가족을 살해했다. 현지 관리인은 처형당한 콩고인의 두개골로 울타리를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레오폴드 2세는 잔혹 행위가 들통나 국제적 비난을 사자 1908년 사유지였던 콩고 소유권을 국가에 넘겼다. 증거가 인멸돼 정확한 사망자 수를 알 수 없지만 20여년간 희생된 콩고인은 300만명에서 최대 1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콩고는 1960년 독립했다.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 시절의 피해는 책임질 수 없다며 사과와 배상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인프라 건설 등 경제 지원을 해줬다.
◇佛, 알제리 독립 돕던 프랑스인에게만 사과
1830년부터 132년간 알제리를 지배한 프랑스도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식민 치하에서 자행된 고문·살인과 독립전쟁(1954~1962)으로 알제리인 30만(프랑스측 주장)~150만명(알제리측 주장)이 목숨을 잃었다.
2012년 독립 50년을 맞은 알제리를 방문한 올랑드 당시 대통령은 "식민 통치가 알제리인들에게 끼친 고통을 인정한다"면서도 "사과하러 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9월 알제리 독립운동을 돕다가 1957년 프랑스군에 납치 살해당한 모리스 오댕의 아내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역사적인 첫 사과였지만 알제리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댕은 프랑스 국적자인 데다 마크롱도 이전 대통령들처럼 국가 차원의 사죄와 배상 문제엔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45년까지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재점령하기 위해 벌인 인도차이나 침략전쟁(1946~1954)도 사과하지 않았다.
독일은 1884년부터 1915년까지 나미비아를 통치하며 7만5000여명을 학살했다. 2016년에야 사죄 방침을 밝혔지만 아직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 독일은 "양국 공동 선언에 담길 사과는 독일의 법적 배상 근거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배상 가능성을 배제했다. 독일도 배상보다는 원조를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이탈리아·영국은 사과 요구에 응해
이탈리아의 리비아 식민 통치(1911~ 1943) 중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리비아인 약 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탈리아는 1956년 4월 '리비아 경제 재건을 위한 기여금' 명목으로 약 48억리라를 건넸지만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가 이 협약을 깨고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하자 이탈리아는 "1956년 화해로 채무가 청산됐다"며 불응했다.
보복에 나선 카다피는 이듬해 리비아 거주 이탈리아인 2만명을 국외 추방했다. 리비아에 매장된 석유와 가스가 필요했던 이탈리아는 1999년에야 식민 지배 책임을 인정했다. 1895년부터 1963년까지 케냐를 지배한 영국도 1952년 마우마우족 봉기를 무력 진압한 것에 대해 2013년 사과했고, 비교적 적은 금액인 1900만파운드를 케냐인 5228명에게 지급했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지금까지 배상 사례로 볼 때 가해국들이 피해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배상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된다고 판단할 때뿐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법적 배상 끝났다" 30년 버틴 독일, 상황 불리해지자 160만명에 개인 배상
서독은 1953년 연합국과 런던부채협약을 맺고 2차 대전 전쟁 배상(賠償)을 일괄 타결했다. 동구권 국가들은 동독으로부터 일부 배상을 받은 뒤 추가 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치 피해에 대한 국가 및 개인 배상, 강제 노동 피해자 배상 등은 별도로 이뤄졌다.
서독이 처음부터 배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 사례가 폴란드다. 서독은 폴란드와 관계 회복을 위해 1970년 '독일-폴란드 상호 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위한 조약'(바르샤바조약)을 체결했다. 폴란드는 동독에 국가 차원의 배상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던 결정을 서독과의 조약에도 적용했으나 "개인 피해자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서독은 "런던부채협약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고 맞섰다. 1972년 외교 관계 복원을 계기로 폴란드는 강제수용소 수감자와 강제 노동 피해에 대한 개인 배상 등을 다시 요구했다. 이번에도 서독은 바르샤바조약으로 종결된 문제라며 거부했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국은 1975년 '배상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독일이 폴란드에 차관 10억마르크와 강제 노역자의 연금 청구 상쇄 명목으로 13억마르크를 제공키로 합의했다. 서독은 다만 '강제 노역에 대한 개인 배상은 이미 해결됐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바이엘·폴크스바겐·지멘스 등 독일의 강제 노역 수혜 기업들도 런던부채협약을 근거로 배상 책임이 없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폴크스바겐이 직원 3분의 2를 강제 노동자로 충당한 사실이 폭로되고, 스위스은행이 나치에 학살당한 유대인 희생자들의 개인 계좌를 파기하려다 발각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또 생존 피해자들이 미국에서 집단 소송 움직임을 보이자 독일 정부·기업들은 국가·기업 이미지가 동반 실추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정치적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2000년 독일은 '기억, 책임, 미래재단'을 만들어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 배상했다. 독일 정부와 6500여 기업이 참여해 약 8조원을 조성해 폴란드는 물론 러시아·체코·벨라루스·우크라이나 출신 강제 노동 피해자 160만명에게 각자 350만~1100만원을 지급했다. 한국 법원이 결정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액은 1억원이다.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최소 14만명으로 추정된다.
※ 참고한 책: 레오폴드왕의 유령(아담 호크쉴드), 역사비평(2015년 여름호), 암흑의 핵심(조셉 콘래드), 아프리카를 말한다(류광철), 과거청산운동백서(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범국민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