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몸싸움 중 악당이 주인공 동료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라고 외친다. 그러자 TV 화면에는 '동료 구조' '동료 포기' 중 하나를 고르라는 안내 문구가 뜬다. 어떤 버튼을 누르느냐에 따라 결말은 달라진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에서는 주인공의 머리와 어깨에 눈발이 쌓이고, 눈에 고이는 눈물까지 생생히 재현된다. 영화가 아니다. 프랑스 게임사 퀀틱 드림이 지난 5월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 전용 비디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한 장면이다.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수십 가지 결말로 나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인터랙티브 무비' 게임이다. 전 세계에서 150만장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이다.
◇넷플릭스·HBO… 이용자가 스토리를 바꾸는 드라마 제작에 나서
인터랙티브 무비라는 새로운 제작 방식이 게임·영화·드라마와 같은 콘텐츠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래 인터랙티브 무비는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게임의 한 장르다.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다른 게임과 달리 게이머는 별다른 조작을 하지 않고, 게임 진행 중 수백 가지 선택을 하는데 이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그때마다 달라진다. 영화처럼 스토리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그래픽이 다른 게임에 비해 실사 화면에 가까울 정도로 생생한 것도 특징이다.
최근 블룸버그 등 외신은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업체인 넷플릭스가 인기 SF(공상과학) 드라마 시리즈 '블랙미러'의 다음 시즌 에피소드 하나를 인터랙티브 무비로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넷플릭스는 이런 인터랙티브 무비와 같은 게임 요소와 전통적인 영화·드라마를 혼합하는 방식을 여러 동영상 콘텐츠에 적용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미국 케이블 방송사 HBO는 올 초 자사 앱에서 인터랙티브 무비 드라마 '모자이크'를 선보였다. 등장하는 주인공 중 어떤 인물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형식이다. 지난 2016년에는 인터랙티브 무비 형식의 영화 '레이트 쉬프트'가 세계 최초로 개봉되기도 했다. 관객들은 주인공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화면이 멈추면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서 주인공의 행동을 결정한다. 주인공은 다수결로 선택된 관객의 지시를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180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주어지고, 7가지의 각기 다른 결말이 있다. 레이트 쉬프트는 영화 상영 종료된 후에 PC게임으로 출시됐고 올해 4월에는 한글 버전도 나왔다.
◇관객과 소통해 수백~수천 가지로 스토리 전개
인터랙티브 무비 장르가 게임·영화·드라마 산업에서 '차세대 콘텐츠'로 각광을 받는 이유는 관객이 직접 이야기 전개에 참여하는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래 영화·드라마는 물론이고 게임도 정해진 스토리로 흘러가는 구조다. 게임에서 게이머는 여러 과제를 수행하지만, 과제를 해내지 못하면 '게임 오버(게임 끝)'이고, 해결하더라도 결말은 정해져 있다. 영화와 드라마는 각본대로 흘러간다. 하지만 수백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는 인터랙티브 무비에선 이야기 전개할 때 경우의 수가 수백~수천 가지에 달한다. 관객들은 제작자와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게임 제작 기술의 발전도 새로운 장르 등장에 한몫했다.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게임은 과거 1980~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단조로운 2D(2차원 평면) 그래픽으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바탕으로 얼굴 표정 묘사와 움직임을 따내는 모션 캡처 기술, 사람의 체형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는 3D 스캔 기술을 활용하면서 게임 화면은 영화처럼 생생해졌다. 마치 실사 영화나 드라마처럼 그래픽이 생생하다 보니 이용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됐다. 비디오 게임 '언틸 던'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등 최근 2~3년 사이 출시된 인터랙티브 무비 게임들이 인기를 끈 이유다.
단점도 있다. 제작비와 제작 기간이 많이 들고 제작 과정도 복잡하다.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대본의 분량도 많아지고 그래픽 작업량도 불어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180명의 개발자가 4년에 걸쳐 제작했을 정도로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인력과 제작비가 투입됐다. 블룸버그는 "예전보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도 대형 콘텐츠 기업들이 뛰어드는 이유는 이 장르가 그만큼 새로운 사용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잠재력이 크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