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직원을 더 뽑기 위해 서류 평가가 끝난 후 남녀 지원자들의 점수를 고치고, 외부에서 부탁받은 지원자에게 면접 점수를 더 줘 합격시킨 KB국민은행 전·현직 임직원에 대해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 최근 은행 채용 비리 사건과 관련해 처음 나온 법원 판결이다. 공공기관이 아닌 사기업 채용 과정이 불공정했다며 형법상 업무방해를 적용해 처벌한 경우는 이례적이다.

서울남부지법 형사11단독 노미정 판사는 26일 업무방해·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KB국민은행 인사팀장 오모씨와 이모 전 부행장, 권모 HR(인사) 총괄상무(당시 인력지원부장)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모 전 HR 본부장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오씨 등은 2015년 상반기 신입 행원 채용 과정에서 남성 합격자 비율을 높이기 위해 남성 지원자 113명의 서류전형 평가 점수는 높이고, 여성 지원자 112명의 점수를 떨어뜨린 혐의로 기소됐다. 2차 면접 전형에서도 인사 청탁을 받은 지원자 등 28명의 면접 점수를 조작해 20명을 합격시킨 혐의도 받고 있다.

사기업의 채용은 그간 경영자나 인사권자의 재량 영역으로 여겨졌다. 기업 이념에 맞는 사람을 우선 채용하는 것은 합법이다. 채용 비리 혐의로 기소된 이들도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으로서 인사 재량을 가지고 있고, 채용 업무 담당자로서 정당한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심사위원들이 평가한 결과를 인사 담당자가 사후에 변경한 것은 채용 재량권을 벗어난 업무 처리"라고 봤다. "이들이 채용팀장·인력지원부장 등 채용 업무 관계자일지라도 다른 심사위원이 평가한 등급을 사후에 수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채용 때 남녀를 차별하는 것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다. 다만 직무의 성격에 따라 특정 성(性)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경우는 예외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남성 직원이 더 필요해서 남성 지원자를 더 뽑았다고 주장하지만 업무 내용에 비춰 볼 때 특별히 남성이 더 필요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2차 면접 참가자 가운데 청탁 대상자의 이름에 메모를 붙여 구분한 것에 대해서도 피고인들은 "합격 여부를 사전에 알리기 위한 표시였을 뿐"이라고 했지만, 재판부는 "청탁 메모가 있는 지원자들의 등급이 상향돼 합격했다"고 했다. 결국 채용 절차에 따라 정해진 합격 여부를 임의로 바꾸는 것은 업무방해에 해당한다고 봤다. 채용 담당자들이 KB국민은행이라는 법인(法人)의 채용 업무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업무방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위력(威力)이나 위계(僞計)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은 1999년 허신행 서울시 농수산물공사 사장이 국회의원 청탁을 받아 실무자들에게 점수를 조작하도록 지시한 사건에 대해 2007년 허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직원 채용 권한을 갖는 사장이 채용 담당자로부터 양해를 받았거나 상호 공모해 벌어진 일"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 KB국민은행 채용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점수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심사위원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계에 해당한다고 했다. 한 대형 로펌의 노무 담당 변호사는 "기업의 불평등한 채용 공고에 대해 남녀고용평등법으로 처벌한 사례는 있지만 사기업의 채용 과정에서 형법상 업무방해를 적용한 경우는 거의 못 봤다"고 했다. 홍수경 노무사는 "공개 채용 도중 인위적 조작으로 채용 기준을 변경하는 행위는 경영 자율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판결"이라고 했다.

국회에서 은행권 채용 비리가 폭로된 이후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KB국민은행 이외에도 신한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전·현직 임직원이 비슷한 혐의로 재판을 받거나 검찰 기소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