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3일 '9·19 평양 공동선언'과 부속 합의서인 '남북 군사 합의서' 비준안을 재가했다. 두 합의서는 국회 비준 동의 절차 없이 법적 효력을 얻은 것이다. 조만간 공포 등을 거치면 관련 예산 확보와 법률 재·개정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평양 선언은 정부 말대로 4월 판문점 선언의 '이행 성격'이 강하다. 판문점 선언을 근거법으로 하는 부수 법안인 셈이다. 지금 국회가 판문점 선언 비준 동의안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부속 합의 성격인 평양 선언을 대통령이 먼저 비준한 것은 스스로 본말을 뒤집는 것이다.

정부는 평양 선언에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울 수 있는 내용이 없어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평양 선언 문구만 보면 '철도·도로 착공식' '개성공단 정상화 협의' '산림 협력' 등 당장 큰돈이 들어갈 사업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철도·도로 사업에만 40조원 이상 들어갈 것이란 추산이 나오는데 정부는 구체적인 공사비 제시도 없이 착공식부터 하겠다는 비준안을 의결한 것이다. 얼마가 들지도 모르는 공사를 착공식부터 하고 보는 법도 있나. 이런 식으로 대북 정책에 '대못'을 박으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군사 합의서는 헌법 60조 1항이 국회 비준을 받으라고 규정한 '안전 보장에 관한 조약'에 해당할 수 있다. 군사분계선(MDL) 일대 비행 금지와 NLL 인근 훈련 중지 등 우리 안보와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 대령 출신인 군사 전문가가 "MDL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북에 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휴전선을 같이 지키는 미국이 모두 동의했다는 공식 발표도 아직 없다. 국회 동의를 받지 않으면 위헌(違憲)이라는 헌법학자 견해가 나온다. 군사 합의서가 '안전 보장'을 넘어 우리 주권과 관련된 조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부는 국가 안위가 걸렸고 위헌 소지가 있는 남북 합의서도 권력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단으로 처리한다. 국회가 위헌 여부를 가리기 위해 헌재에 권한쟁의심판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북 비핵화는 북이 핵 신고서 제출을 거부하고 미·북 핵 실무 회담을 회피하면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이 실질적 비핵화를 하고 난 뒤에 줘야 할 선물 보따리를 벌써부터 풀고 있다. 북 비핵화에서 순서가 뒤바뀌면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핵 보유를 돕는 결과를 낳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