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한국사회에서의 여대(女大)는 대학 그 이상의 의미였다. 지난 100여 년간 여성 엘리트 집단을 대표해 온 여대는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역사이자 여성 리더의 산실로 평가돼왔다. 하지만 최근 대학들이 재정난과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여대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이 보편화하고 남녀공학 선호가 늘면서 여대만의 정체성을 찾기가 어려워져서다. 아울러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대가 가진 입지가 변화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에 앞으로 국내 여대가 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녀공학 선호로 대입 경쟁력 낮아져
국내 여대는 이화여대를 필두로 지난 132년간 차세대 여성 인재를 발굴·양성하며 학문과 사회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현재 서울 6곳(덕성·동덕·서울·성신·숙명·이화여대)과 지방 1곳(광주여대) 등이다. 하지만 최근 여고생들 사이에서 여대의 인기가 주춤하면서, 여대 위기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고 3 수험생 이한결(18·가명)양은 "선배들이 '여대에서 학점 따기는 자율형사립고(자사고)에서 내신 잘 받는 것만큼이나 치열하다'고 해서 이번 수시모집에 여대 지원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극심한 취업난에 대비하려면 학점이나 대내외 활동이 중요하다는 데, 여대보단 남녀공학이 여러모로 나을 거라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하 전국진학지도협의회 수석대표는 "수험생을 대상으로 대입 상담을 해보면, 최근 몇 년 새 여대를 꺼리는 여학생들이 두드러진다"며 "대입준비 등으로 여고시절 억눌려 지냈던 학생이 많은데, 이런 학생들이 주로 여대보단 폭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남녀공학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여대 입학 성적도 과거보다 하락했다는 분석이다. 유석용 서울진학교사협의회(서진협) 회장은 "여대 최상위권 대학이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대학과 경쟁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입학성적이 과거에 비해 다소 낮아졌다"고 말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성적이 우수한 여고생 대다수가 여대보단 남녀공학을 선호하며, 여대를 이른바 '인서울'하기 수월한 통로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간 경쟁의식을 갖고 특화된 학과를 키우려는 노력이 여대 내에 부족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사회 전반으로 퍼진 '여대 편견' '남녀 갈등'도 원인
사회 전반에 걸친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여대에 대한 편견도 위기 중 하나로 꼽힌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고착된 사람들의 편견이 여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여대 재학생·졸업생 사이에서 여대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차별을 경험했다는 얘기가 속속 나온다. 이혜진(가명·이화여대 졸)씨는 "학교에 다니면서 '여대 학생들은 기가 세고 허영심이 많다' '여자들끼리만 있어서 재미없고 경쟁만 치열하겠다' 등과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다"며 "그럴 때마다 여대가 가진 고착화된 틀에 저 자신이 갇힌 느낌"이라고 전했다.
최근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여혐(여성혐오)' 등 사회 전반에서 심화하는 남녀 갈등 구도도 여대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여자만 입학 가능한 여대의 특징이 남자를 배제하는 성차별이란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지난 16일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여대 폐지를 요구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여대의 존재 목적이었던 여성의 교육보장은 이미 충분하다"며 "정부는 심각한 남성 역차별을 멈춰달라"고 전했다.
◇세계 여대 변화 모색… "국내도 개혁 필요해"
그렇다면 우리보다 앞서 여대를 설립한 해외의 상황은 어떨까. 미국·일본 등 세계 각국의 여대들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기를 겪었다. 세계 최초로 여대를 세운 미국은 19세기 초반 남학생뿐 아니라 여학생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여대를 설립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여성의 교육 기회가 확대되면서 여대의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140년 이상의 여대 역사를 가진 일본도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재정난 가중 등으로 그 경쟁력이 점차 약화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이들 여대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 미국 여대의 경우 한 분야에 특화된 전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학생들이 단순히 여자만 입학할 수 있어서 여대를 택하기보단, 학과의 우수성과 졸업생들의 사회적 성취도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세계 최초의 여대인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Mount Holyoke College)은 인문교양 분야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모교로 유명한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경우 정치학 분야에 특화돼 있다.
일본은 다소 파격적인 행보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모습이다. 여성의 정의를 넓혀 성적소수자에게도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국립 여자대학인 오차노미즈여대는 2020년부터 호적상 남성이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이라고 인식하는 성전환자의 입학을 허용하는 방침을 지난 7월 공식 발표했다. 이 외에 일본의 다른 여대 4곳도 성전환자 입학 허가를 본격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일각에서는 국내 여대도 해외 사례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학부 교수는 "여대가 위기라고 해서 이를 없애거나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려 하는 것은 일차원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라며 "여대의 큰 틀은 유지하되, 여학생 특성상 유리한 분야를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특화해가는 등의 현실적인 대책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모 여대 관계자는 "학령인구 감소 등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이어진 위기가 비단 여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 대학도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평생교육 과정을 개편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특성화 전략을 꾀하는 등 여러 자구책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