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희·무용연구가

15년간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던 황혜민은 작년 은퇴 공연을 마친 후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노랗게 염색했다. 노란 단발머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 익숙했던 발레리나가 갑자기 맞닥뜨린 해방감과 당혹감을 분출하는 방식이었다.

자기 몸이 악기인 발레 무용수들에겐 금기가 많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은 여성 무용수만이 아니다. 바짝 깎은 머리의 왕자를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 무용수도 마찬가지. 다리 근육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하이힐도 조심스럽다. 테니스는 양팔 굵기가 달라질까 봐, 스키는 다리를 다칠까 봐 꺼린다. 한여름 선탠도 수영복 자국이 남을까 봐 못하고, 문신은 레오타드로 숨겨지는 부위에나 가능하다.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의 전기영화 '댄서'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악동 폴루닌은 온몸에 문신을 새긴 걸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지젤' 공연 전 블라우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의 문신에 열심히 파운데이션을 발라 가리는 장면이 나온다.

발레 무용수에겐 다이어트도 필수다. 입문 단계부터 스스로의 몸을 엄격하게 평가하는 게 버릇이라 먹어도 걱정이고 안 먹어도 걱정이다. 콩쿠르나 공연을 앞두고 극심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폭식으로 보상받거나 거식증을 겪는 이야기는 발레를 다루는 이야기의 클리셰가 됐다. 내가 무용수였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밥을 차리실 때면 중얼거리셨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으라 할 수도 없고 안 먹으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금욕적인 것은 아니다. 발레리나들이 의외로 많이 먹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발레단 공연 뒤 한우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다가 끝없이 고기를 시켜대는 통에 한동안 고깃집 회식이 열리지 않은 적도 있다.

은퇴한 발레리나 황혜민은 이제 골프도 배우고 맛집도 다닌다. 단발로 자른 머리칼이 자라며 노랗게 물들인 부분이 점차 사라지듯 발레리나 이후의 삶에도 적응하는 중이다.

※10월 '일사일언'은 정옥희씨를 비롯해 오재철 여행작가, 봉달호 '매일 갑니다 편의점' 저자, 오소희 작가, 이린아 2018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가 번갈아 집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