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10월 영국 굴지의 유명 로펌 소속 변호사 112명이 영국 케임브리지 법대생 4명이 만든 법률 AI(인공지능)와 맞붙었다. 종목은 영국 PPI(지급보증보험) 불완전판매 사건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었다. PPI는 보험 가입자가 예기치 못한 일로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게 됐을 경우 보험사가 대신 갚아주는 보험상품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다른 금융상품에 '끼워 팔기' 형태로 수백만 명에게 판매됐다. 이후 계약 내용이나 보험료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판매된 사실이 드러나 보험사들이 납입 보험료에 이자까지 모두 290억파운드(약 43조원)를 배상해야 했다.
변호사들과 법률 AI '케이스 크런처 알파'는 이 사건과 관련한 실제 케이스 775건을 풀었다. 상황을 제시받고 소송으로 가야 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정하는 문제였다. 예측 결과는 법률 AI의 압승이었다. 케이스 크런처 알파는 86.6%의 적중률을 보였고 변호사들은 66.3%에 그쳤다. 그런데 변호사들의 시간당 자문료는 300파운드(44만원), 법률 AI는 17파운드(2만5000원)에 불과했다.
#2.
지난 4월 해사중재인협회(LMAA) 중재재판이 열린 영국 런던의 한 법정. 국내 조선소가 수주한 수천억원짜리 선박 발주에 들어간 1차 선수금을 돌려달라는 국제중재 사건이 올라왔다. 중재재판의 기준이 된 법은 영국법. 중재재판부 3인 모두는 영국 왕실 변호사(Queen's Counsel)였다. 한국 기업을 대리해 윤병철 변호사 등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5명이 중재법정에 섰다. 상대 기업을 대리한 곳은 규모가 영국 내 1~2위를 다투는 유명 로펌이었다. 선박 자체가 고가였던 데다 1차 선수금이 들어온 시점이 2008년이라 이자까지 모두 더한 소송가액은 1000억원이 넘었다.
이 재판과 관련한 문서만 10만 쪽이 넘었다. 변호사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분석에는 수개월이 걸리는 분량이었다. 김앤장은 자사(自社) 리걸테크 기법을 활용했다. 소송 관련 정보와 서류, 상대 측이 제출한 수만 건의 의견서 등을 모두 '전자증거개시(E-Discovery)'라는 프로그램에 입력했다. 이 프로그램은 소송 관련 서류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짜임새 있는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든다.
김앤장 변호사들은 이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검색 기능을 통해 소송에 필요한 서류들을 빠른 시간 안에 추출했다. 김앤장 관계자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주요 소송 문건을 빠트리지 않고 확보해 효과적인 소송 전략을 짤 수 있었다"고 했다. 그 결과 국내 조선소가 선수금 및 이자를 전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이 났다. 김앤장의 100% 승리였다. 윤병철 변호사는 "과거 글로벌 로펌이 선점했던 국제중재 분야에서 김앤장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법률 서비스 리걸테크(legaltech)가 법률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미국 캐털리스트 인베스트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미국 법률 서비스 시장 규모는 4370억달러(약 480조원)이고, 이 중 리걸테크 시장의 규모는 160억달러(약 18조원)다. 전문가들은 이 분야가 3년마다 1.5배씩 성장할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에서 개발된 법률 AI '로스(ROSS)'는 초당 10억장의 판례를 검토한다. 사람의 일상 언어를 알아듣고 법률 문서를 분석한 후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법률 AI인 '컴퍼스(Compas)'는 법정에서 폭력 사범인 피고인의 재범 가능성을 분석해준다. 계약서 등 법률 서면을 자동으로 작성해주는 법률 AI는 흔한 일이 돼가고 있다. 영국에서는 법률 AI가 범죄 수사에도 쓰이고 있다. 지난해 영국 중대범죄수사청(SFO)은 자동차 제조사인 롤스로이스의 불법 로비 혐의를 수사하는 데 법률 AI를 활용했다.
미국 버몬트 로스쿨의 구디노프 교수는 리걸테크의 혁신 단계를 ▲기술적 능력이 향상되는 1단계 ▲기술이 점차 사람을 대체하는 2단계 ▲기술이 현 체제의 근본적인 재설계 또는 교체를 가져오는 3단계로 구분한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벌써 2단계의 모습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발간된 '유엔 미래보고서 2045'는 30년 후 AI에 대체될 위험성이 큰 직업 중 하나로 변호사를 선정했다. 미국 컨설팅회사 딜로이트도 같은 해 "20년 후 영국 법률시장 일자리의 39%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점차 성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6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법률 인공지능 경진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인텔리콘 메타연구소(대표 임영익 변호사)가 일본과 유럽 팀을 꺾고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인텔리콘은 지난 2월부터 국내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대륙아주와 협약을 맺고 법률 AI '유렉스'를 공급하고 있다. 유렉스는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로 사건을 검색하면 관련 법률과 판례를 동시에 찾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