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8월 30일 오후 2시 45분쯤. 서울 서초구 잠원동 뉴코아 스포츠센터 어학원 앞에서 영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초롱초롱빛나리(당시 8세)양이 사라졌다.
"나리가 어떤 ‘젊은 아줌마’랑 갔어요." 같은 반 친구들의 말에 나리양 어머니는 ‘유괴’임을 직감했다.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이 급파됐다. 나리의 집 전화기에 녹음기·발신지 추적 장치가 달렸다. 모두가 유괴범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종 3시간 만이었다.
"나리네 집이죠. 나리는 잘 있어요."
"목소리라도 들려주세요!"
첫 통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발신지 추적 장치가 작동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피 말리는 밤이 저물었다. 납치 이튿날 오후 3시 52분쯤, 두 번째로 수화기가 울렸다. 범인은 이번에 돈을 요구했다. "나리를 잘 데리고 있어요. 2000만원 준비해 명동 전철역 남대문 방향 출구 앞에 있는 건물 8층으로 나오세요."
이번에는 발신자 추적장치가 위치를 찍었다. 서울 중구 명동의 한 공중전화였다. 형사들이 현장을 덮쳤지만,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같은 날 밤 9시. 다시금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지는 명동의 한 카페. 형사들은 나리양 어머니에게 "전화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고 당부하고, 9분 만에 카페로 들이닥쳤다. 이때까지도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카페에 남아 있던 손님은 13명. 경찰은 주변을 봉쇄하고 하나하나 검문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님 가운데 만삭 임신부가 한 명 있었다. 그는 "(경찰 검문으로)아기가 놀라서 배를 차고 있다. 병원에 급히 가봐야 한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임신부 대학 후배들까지 몰려와서 형사들을 압박했다. 경찰은 지문만 채취하고 그 임신부를 풀어줬다. 카페에 남은 다른 모든 사람은 혐의점이 없었다. 나리 집으로 더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만삭 임신부가 범인이었던 것이다.
경찰 눈앞에서 사라진 범인 전현주(당시 28세)는 잠적해버렸다.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사건은 공개수사로 전환된 9월 3일부터 대중에게 알려졌다. 전국에는 나리양 사진 20만 장이 뿌려졌다. 서울 시내 300만여 세대에선 ‘나리양을 찾기 위한 임시 반상회’가 열리기도 했다. 실종 14일째, 전현주는 은신처였던 서울 신림동 여관에서 체포됐다. 나리양의 시신은 서울 동작구 한 극장의 지하창고에서 발견됐다.
◇ "나리 잘 있다" 했지만, 납치 9시간 만에 목 졸라 살해
서중석(61)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당시만 해도 젊은 법의관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어서 돌아온 나리양의 부검을 맡았다.
Q. 세상이 떠들썩했던 유괴·살인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을 알았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997년 9월 12일. 밤새워 당직한 다음 날이었는데, 나리양 시신이 발견됐다는 연락이 왔다. 혹시나 현장에서 훼손될까 봐 곧바로 달려갔다. 시신은 부패해 있었다. 유괴 초기에 살해됐던 것이다."
Q. 사인(死因)은 무엇이었나.
"액사(扼死). 다시 말해, 목이 졸려서 숨졌다. 목 왼쪽 부근의 출혈, 턱 밑의 까진 상처가 근거다. 머리와 등에서 내부 출혈이 발견됐다. 목을 조르기 이전에 주먹으로 때린 것으로 판단된다. 시신 왼편에 상처가 집중돼 있었다. 범인이 오른손잡이라는 의미였다."
Q. 부검의 초점은 어디에 맞췄나.
"유괴 후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음식을 먹여야 한다. 위장 내용물에 초점을 맞추고 부검을 진행했다. 그런데 나리양 소화기관은 비어 있었다. 유괴 이후 6시간 이상 흐른 시점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유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배고파하고 지쳐 하니까 살해했을 가능성이 컸다."
Q. 나리양에게서 수면제가 검출됐다던데.
"그때 당시만 해도 수면제를 어느 약국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독실아민(doxylamine)이라는 수면제가 미량으로 검출됐다. 약효가 체내에 이미 작용했다는 의미다. 아이에게 약을 먹여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해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Q.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 있나.
"경찰은 전씨 증언을 토대로 나리양의 사망 시각을 유괴 11시간 만인 8월 31일 새벽 2시쯤으로 특정했다. 범행 동기는 '생활고'였다. 전현주는 정부 고위공직자의 딸이었다. 그러나 입학한 대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1995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진학했다. 이곳에서 연극을 하던 남편과 만났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97년 결혼했다.
전현주는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 집안의 재력 등에 대해 무수한 거짓말을 했다. 남편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혼 직후, 남편의 인형극단이 실패한 뒤 경제적인 어려움에 닥쳤다. 전현주는 뉴코아 문화센터를 무작정 배회하기 시작했다.
세련된 옷차림의 나리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재미있는 곳에 가자'며 남편이 운영하던 서울 동작구 사당동 극장의 지하창고로 유괴했다. 살해장소도 이 지하창고였다."
범인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남성 ‘공범’들이 자신을 성폭행했고, 유괴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피해자라는 것이다. 검찰은 전현주가 ‘죄책감을 덜기 위해 가공의 공범을 창조해냈다’고 봤다. 1993년 7월 그가 적십자 병원에서 ‘연극성 인격장애’란 진단을 받았다는 점이 근거였다.
전현주를 상담한 정신과 전문의는 법정에 출석해 "연극성 인격장애환자는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행동을 과장하고 심하면 가공의 인물을 만들기도 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문예창작과를 나와 글쓰기에 재주가 있는 전 피고인이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무의식 상태에서 가상의 공범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다. (전현주는 ‘남편 등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생각에서 성폭행범 위협에 못 이겨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 진술했다’는 진술서를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Q.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렸나.
"검찰은 전현주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전현주가 처음에는 나리양을 살해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유괴 이후) 범행이 발각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휩싸여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이라며 '생명을 박탈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전현주가 초범이라는 점, 구금 기간 중에 아이를 출산했다는 점 등도 참작됐다.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과 대법원 결론을 내렸다.
‘박초롱초롱 빛나리’ 유괴납치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일이 있은 이후 ‘긴 이름’을 피하는 풍조가 생겼다.
서 전 총장은 은퇴 후 법의학연구소를 차리고, 국과수 의뢰로 하루 2~3건의 부검에 나서고 있다. 전현주는 지금도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