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1954년 강원도 평창에서 감자·배추 농사를 짓는 집의 1녀 9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고향을 떠나 강릉대 미학과에 진학해 두 살 어린 후배와 연애했고,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았다. 용평리조트에 다니며 월급도 남부럽지 않게 받았다. 그러던 1997년 10월의 명예퇴직.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한 달 전이었다. 퇴직금으로 사업하기엔 위험했다. 그러다 찾아간 직업훈련학교. 나무를 만지는 게 좋아 2년간 집 짓는 걸 배웠다. 그리고 '20년 만의 귀향(歸鄕)'. 대대로 물려받은 3만 평의 땅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지은 17가구. 대관령 펜션촌의 시작이다.
아내
1956년 강원도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북 사람이었다. 강릉대 미학과에 입학해 선배와 연애결혼을 했다. 그리고 찾아간 시댁. 장작 때서 가마솥에 밥 짓는 대관령 산골이었다. 전기도 결혼 한 달 전에야 들어왔다. 그곳에서 시댁 식구와 일하는 사람 17명의 밥을 4년 동안 짓다가 분가했다. 남편은 든든한 가장이었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컸다. 그러던 1997년 10월 남편이 퇴직했다. 처음엔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안 후 "좀 쉬세요"라고 다독였다. 남편은 어느 날부터 직업훈련학교에 다니며 건축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했다. "우리 고향으로 돌아갈까?"
시어머니
셋째네 부부가 돌아왔다. 신혼 때 4년 데리고 살다 분가시킨 후 20년 만이다. 아들은 톱과 망치를 들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생활 체육을 가르친다며 동네를 가로질렀다. 셋째 부부가 들어오면서 6남매가 내 품에 모였다. 아침 일찍 큰아들 집에서 일어나면 한바탕 마실이 시작된다. 큰딸이 운영하는 펜션, 셋째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를 거치며 '차는 몇 대나 서 있나, 손님은 얼마나 있나'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남편과 자식 넷은 먼저 떠나보냈지만, 이렇게 억척같이 살다 보니 내 나이 100세.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행복한 가정이라고 고민이 없으며, 불행한 가정이라고 기쁜 순간은 없을까.
집을 짓다가
서울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이 집이 등장한다.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차항길. 흰색 바탕의 검은색 테두리가 적색 벽돌과 어우러지며 알프스에 온 것 같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2층집. 최승래(64)·김정숙(62)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티팩토리(T Factory)다. 2007년 문을 열었고, 2층은 카페, 1층은 댄스 교실, 지하는 목공예실이다.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올 초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캐나다 선수 지원팀의 쉼터였다. 그 옆에는 남편 최승래 엔비하우징 대표가 지은 펜션 겸 전원주택 '차항빌리지'가 있고,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최씨의 큰누나가 운영하는 '티 펜션', 최씨의 여섯 남매 가족의 집들이 모여 있다.
―이 찻집은 누구 작품입니까.
남편 : "아들(최진헌 디자이노 대표)이 지었어요. 제가 퇴직했을 때 아들은 군대에 있었는데, 한번은 휴가 나와서 제가 집 짓는 걸 보러 왔더라고요. '아버지, 저도 집 짓고 싶어요', 이래요. 원래 아들은 기계공학 전공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제대하고 내 옆에서 1년 동안 집 지어보고, 그래도 하고 싶으면 제대로 해 봐라'고 했어요. 그래서 함께 허리에 장비 차고 망치질해가며 집을 지었죠. 그리곤 전공을 바꿔 호주에 건축 유학을 다녀오고, 귀국해 지은 첫 집이 '티팩토리'예요. 제가 좋아하는 나무(Tree), 애 엄마가 좋아하는 운동(Training), 저희가 모두 좋아하는 티(Tea)를 담았죠."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동경하네요.
남편 : "모든 가장의 우선순위는 자신보다 가족이에요. 그런데 아들이 저를 멘토로 생각해주니 좋죠. 제가 ROTC 출신인데,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게 아들이랑 같이 일하고 자주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저희는 매일 통화하고 2~3일에 한 번은 만나거든요. 아들이 35세에 건축일을 시작해 늦었다고 겁을 먹는데 전 45세에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늘 '넌 나보다 10년 빨리 시작했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말하죠."
―이곳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내 : "아들 결혼식요. 하우스 웨딩으로 했거든요. 꽃꽂이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화로 결혼식장을 멋지게 꾸며주고, 전 음식 준비를 도맡았어요. 그런데 몇 분이 오실지 가늠이 안 되는 거예요. 450명 정도 예상했는데, 750명이 오셨어요. 거의 동네 축제였죠. 그렇게 3일을 손님을 먹이고 재우고 했어요. 그런데 잠을 하루에 1~2시간밖에 못 잤는데도 안 피곤한 거예요. 그래서 깨달았죠. '경사스러운 일을 하면 몸살이 안 나는구나. 내가 너무 행복한 결혼식을 치렀구나.'"
―따님은요?
아내 : "사위가 서울 사람이라 서울에서 했어요. 딸도 여기서 적성을 찾았어요. 제 일을 돕는 걸 보다가 알게 된 건데, 딸 손맛이 제법 괜찮더라고요. 여기가 유명해진 게 조식 뷔페 때문이었는데, 그걸 책임졌던 게 딸이었어요. 커피 로스팅도 하고, 감자 등 10가지 채소를 넣어 '웰빙 수프'도 만들고."
―자녀분들이 재주가 많습니다.
아내 : "부모는 늘 자식 자랑을 하고 싶어 해요. 물론 제 아이들이 대기업 다니고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 주관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게 저는 멋지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남편과 아들이 일 마치고 와서 그러는 거예요. '아들아, 난 망치 소리가 제일 좋더라.' 그랬더니 아들이 그래요. '아버지, 저도 그럴 때 제일 행복해요.' 전 거기서 우리 가족의 미래를 봤어요. 적어도 우리 가족은 부모 자식 간에 소통이 안 돼 힘들지는 않겠구나. 이 공간이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었구나. 이 정도면 훌륭하진 않아도 바람직한 가정은 아닐까."
―어떤 부모가 되고 싶나요.
남편 : "전 지금도 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살아요. 어느 시기가 되면 아이들도 알 거라고 믿어요. 그때가 되면 저에 대해 훌륭하다고는 생각 못해도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다 갔구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대관령에 시집온 새댁
스물둘. 아직은 ‘살림’이라는 단어가 낯선 나이다. 시댁은 감자·배추 농사에 목장까지 운영했다.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아주버님과 형님들을 모시며 농사일·목장일·집안일을 해야 했다.
―시댁 식구들과 사는 것 힘들지 않나요?
아내 : "어릴 때는 힘들었어요. 전 가스불에 밥 해먹고 자랐는데, 여기선 가마솥에 밥 짓고 화롯불에 반찬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한번은 가마솥에 불붙이다가 앞머리가 다 탄 적이 있어요. 얼마나 서러웠던지. 소에 직접 주사도 놓아보고. 그래도 전 친척이 없어 식구 많은 게 좋더라고요. 어릴 때 친척집에 놀러 간다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거든요. 연애하다 처음 시댁에 놀러 왔을 때 (시)어머니께서 감자를 쪄 주셨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그때 어른들이 제게 '(시)할아버지에게 인사해'라고 해서, 제가 '안녕하세요'라고 했는데 다들 당황하시는 거예요. 절을 하라는 말이셨거든요(웃음). 정말 철딱서니가 없었죠. 저보다 큰형님이 힘드셨을 거예요. 저보다 열두 살 많으세요. 제가 4년 뒤 분가할 때 형님에게 말씀드렸어요. '철딱서니 없는 것 데리고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형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내 : "별말 안 하셨던 거 같아요(웃음). 저는 셋째니깐, 어머니한테도 '이러시면 안 돼요'라고 할 말 다 하는 스타일이고. 아이들이 그러는 제 모습을 보고 '엄마는 할머니 눈 밖에 났어'라고 웃을 정도예요. 그런데 이렇게 붙어사니깐, 가끔 어머니가 제게 와서 형님 흉을 보세요. 그럼 전 무조건 형님 편을 들어요. 어머니가 가끔 저희에게 호박 같은 음식을 형님 모르게 갖다주세요. 전 그럼 그거 그냥 밖에 둬요. 나중에 서운해진 어머니가 '너 왜 호박 안 먹어' 하시면, '어머니, 제가 필요하면 형님께 말씀드려서 받아갈게요'라고 말해요. 그러고 나니 이젠 형님께도 제 흉을 보고 그러셨던 거 같더라고요. 저희가 셋째니깐 가족들끼리 붙어살려면 가운데서 잘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이 살아서 좋은 점은요?
남편 : "식구들 일을 대략 알 수 있다는 게 안심이에요. 여기가 시골이잖아요. 명절에 자식들이 와서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가요. 그러면 약장사들이 와요. 어르신들 모아놓고 약을 파는 거예요. 저희 어머니가 귀가 안 좋으시거든요. 한번은 어머니가 '이 약을 먹으면 내 귀가 뚫린다 하더라'면서 약을 사시겠다는 거예요. 60만원이라는데. 저희가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걸 약장수가 어떻게 고치냐'니깐 어머니가 '그래도 난 한번 먹어보련다'라며 고집을 피우세요. 그래서 제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했죠. 그랬더니 다음 날 어머니가 오셔서는 '얘, 뭔 놈이 경찰에 찔러서 순경이 왔다 갔다'며 아쉬워하세요. 그놈이 저라는 건 말 안 했죠(웃음)."
―곧 추석입니다.
아내 : "추석 이틀 전이 어머니 생신이에요. 올해가 딱 100세. 최근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해서 요양원에 모시고 있어요. 큰형님도 무릎 수술을 해서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안 되거든요. 요양원에 계신 분들도 다 동네 분들이어서 자식들이 다 같이 음식 해서 요양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미역국이랑 백설기 떡이랑. 100세 생신은 백설기 한다더라고요. 시댁 식구들이 불편하진 않아요. 불편했다면 이렇게 붙어살지 못했겠죠. 그렇다고 시댁이 친정은 아니에요. 시어머니가 절 예뻐하시지만, 아들만큼 며느리를 사랑하진 않아요.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가까이에서 지내는 것, 그게 저희 집안이 화목한 이유 같아요."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기 3년 전, 캐나다올림픽조직위원회 통역사가 연락했다. 캐나다올림픽조직위원회 소속 72명이 먹고 잘 곳을 정해야 하는데 한번 보러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올림픽 한 달 동안 숙식을 해결한 후 2월 28일 떠나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계약한 후 부부는 한 달을 ‘민간 외교 사절단’으로 보냈다.
―가장 힘든 부분은 뭐였나요?
아내 : "식사요. 메뉴에 통호밀빵, 스크램블 에그, 요구르트, 커피 등이 빠지면 안 된대요. 그런데 여기서 통호밀빵을 어떻게 구해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파리바게트의 SPC그룹 허영인 회장님이 저희 카페를 방문하셨어요. 대관령에서 목장을 하시는데, 마을 분들에게 정말 잘해주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반가워서 달려가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필요한 만큼 보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들이 힘들어한 건요?
남편 : "놀랍게도 추위요. 캐나다도 굉장히 추운 나라인 줄 알았는데."
―헤어질 때 아쉬웠겠어요.
아내 : "밸런타인데이에 그분들이 우리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겠대요. 그동안 챙겨줘서 고맙다고. 팬케이크 굽고 하는데 너무 고마웠죠. 그래서 제가 마지막 날 폐회식 못 가는 친구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어요. 갈비 굽고 구절판 만들고. 다들 부둥켜안고 울고. 한 달 동안 별 보고 출·퇴근하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어느 정도 국위 선양을 한 건 아닐까 뿌듯했어요. '그래도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 평창에 가면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주겠지?'라는 생각. 캐나다올림픽조직위원회 회장님이 고맙다고 인사도 오셨어요."
―이 공간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나요?
아내 : "저희 집 단골인 한 호텔 사장님이 '이곳은 미슐랭 2스타 같다'고 하셨어요. 1스타는 가까이 있으면 갈 만한 곳, 2스타는 시간과 다리 품을 팔아 갈 만한 곳, 3스타는 바다를 건너서라도 갈 곳인데, 이곳은 서울에서 종종 위안을 받으러 오는 곳이라고요. 여기서 커피 마시는 게 인생의 낙(樂)이래요. 한번은 큰 사업 하시는 분이 오셨는데, 제가 여행 다니며 모은 골동품을 보더니 그래요. '유학 간 아들이 공부 안 하고 골동품만 모으다 파주에 카페를 내기에 크게 화를 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카페도 큰 자산이 되겠네요'라고요. 잔소리를 안 하다 보니 부자(父子) 사이도 좋아지셨대요. 여긴 굉장히 추운 곳이에요.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속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