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 위기가 한국 사회를 뒤흔든 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시작해 보자. '바이(buy) 코리아'로 대변되는 주식시장의 열기가 1999년을 기점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 열기는 점차 부동산 시장으로 퍼져 나갔다. 분양가 상한제 등 각종 규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은 건설업체들은 수도권 외곽에서 대형 평형 고급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숨 고르기에 나섰다.
흥미롭게도 이 시점에 강남의 낡은 중소형 아파트가 자산 증여 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런 아파트를 주목한 이는 주로 1970년대 이후 강남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특정 세대의 상위 중산층이었다. 1990년대 말, 그들은 노후 준비와 함께 장성한 자녀의 미래를 근심해야 하는 생애 주기상 시점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이 주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양도세나 증여세 기준이 되는 국세청의 기준 시가가 일반 아파트는 시세의 70~80% 수준인 반면, 중소형 평형 저층 아파트 일부의 기준 시가는 시세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녀 이름으로 구입해 증여세를 납부해도, 실제 증여 자산 규모에 비해 세금 부담이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낮은 용적률로 재건축까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강남의 1970~80년대를 밀착 경험한 이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절세 테크닉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흐름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는 고도성장기에 저축과 자산을 중심으로 진행된 소득 재분배 정책의 수혜 집단이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의 정책 입안자들은 수출 주도형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안에서 임금 상승 억제책을 펼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으로 소득 재분배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추진된 소득세 감면, 근로자 재산 형성 저축, 분양가 상한제 등은 화이트칼라 중심 중산층 형성의 핵심적 기제였다.
제도가 마련되면 빈틈을 파고들어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흐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강남 아파트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이들은 1970년대 후반의 부동산 폭등기를 거치면서 평형별 가격 상승의 시간차를 이용해 좀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봄과 가을, 소형 평형부터 오르기 시작한 아파트 가격의 상승세가 중대형 평형으로 확산하는 데는 한 달가량이 걸리는데, 이 시간차를 적절히 이용하면 집을 늘려 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넓힌 이들 일부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자신의 자산 증식 전략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전세를 활용한 다주택 보유 전략이 그것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20세기 후반 10년 주기의 부동산 호황을 바탕 삼아 강남에서 개발된 자산 증식 전략은 21세기의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접어들면서 수도권 중산층 다수의 생존 전략으로 전면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도 근로소득 향상만으로는 제 삶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 기대치 않는 시대, 고도성장기의 잔해로 쌓아 올린 '내 집 마련'의 높은 진입 장벽 앞에서 젊은 세대 일부가 저출산으로 대처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