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감고 범법 행위를 하거나 야간 응급 환자는 대형 병원으로 다 보내거나 해야죠."(전북 지역 A병원장)
"찜찜하겠지만… 의사·간호사가 고발하지 않길 바라야죠."(인천 지역 B병원장)
1일부터 보건업 등 근로시간 특례 업종에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 규정이 적용되면서 지역 중소 병원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주 52시간제'를 도입하면서 병원(보건업) 등 5개 업종에만 '노사가 합의하면 그 이상 일할 수 있다'고 특례를 허용했다. 하지만 그러면서 '특례 업종도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을 보장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퇴근 후 다음 출근 시간까지 무조건 11시간은 연속으로 쉬라는 얘기다. 문제는 병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다. 국내 병원들은 노사 모두 "병원은 '온콜(비상 대기)'이 있고, 야간 수술·진료 상황이 왕왕 생겨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을 적용하면 특례 업종이 된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병원은 근로시간 특례 인정 어려워져
특히 지방 중소 병원들 고민이 깊다. 이성규 대한의료법인연합회 회장은 "지방 병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는데, 앞으로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이 시행되면 밤에 야간 수술한 의사가 다음 날 외래 진료를 할 수 없게 된다"면서 "그렇게 되면 낮 시간에 의료 인력이 더 부족해지기 때문에 중소 병원들이 야간 수술, 응급실 운영 등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특례 적용을 포기하고 주 52시간을 지키기도 어렵다. 주 52시간제를 하려면 사람을 더 뽑아야 하는데, 지방에선 의사·간호사 구하기가 쉽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지방 중소 병원은 근로기준법을 어겨가며 운영을 하거나 병원 기능을 축소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병원 관계자는 "병원장 입장에선 의사·간호사가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을 넘겼다고 문제 제기를 하지 않기만 바라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의료 인력 '서울 쏠림' 더 심해질 듯
서울 대형 병원도 어려움이 있다. 특례 업종으로 남으려면 노사 동의가 필수적인데, 서울 대형 병원들은 노조 동의를 받기 힘들다. 민주노총 산하 보건의료노조는 '특례 합의 거부'를 지침으로 세웠다. 현재까지 산하 사업장 중에서 특례 적용에 합의한 곳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의료노조는 '주 52시간 도입' 등을 내걸고 파업 절차를 밟고 있다. 한국노총 쪽 입장도 비슷하다고 한다.
업계에선 병원의 20% 정도만 특례 적용에 합의를 이뤘다고 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애초부터 병원 업무 특성상 특례 적용은 어렵다고 봤다"고 했다. 한 대형 병원 관계자는 "서울대병원 등 다른 서울 대형 병원도 노조 동의를 얻기가 어려워 특례 적용이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서울 대형 병원들이 주52 시간 근로시간을 맞추기 위해 인력 확충에 나설 경우 지방 병원의 의료 인력 부족이 더 심해질 거라는 점이다. 지방 중소 병원들 사이에선 "지방에선 '의사 임금을 1.3~2배가량 줘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앞으론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정영호 대한중소병원협회 회장은 "원래도 문제였던 지방 중소 병원의 인력 부족 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 같다"고 했다.
◇복지부는 "문제없을 것"
상황이 이런데도 업계가 느끼는 위기감과 정부의 현실 파악은 온도 차이가 크다. 병원업계 관계자들은 "주 52시간제를 지키려면 정부가 의료 인력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의사협회 등 직역 단체들이 대체로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반대 입장이고, 교육 기간 등을 고려하면 인력 양성에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했다.
복지부는 아직 병원별 특례 도입 여부를 포함해 구체적인 실태 조사도 마치지 못한 상황이다. 고용부도 내년에나 보건업 등 근로시간 특례를 적용받을 수 있는 업종에 대한 연구 용역을 진행할 계획이다. 복지부는 "중소 병원들은 300인 미만 사업장이 많아 주 52시간제 적용(2020년 1월 1일)까지 여유가 있어 당장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성규 의료법인연합회 회장은 "정부가 시급히 대책을 세워주면 좋겠다"고 했다.
☞근로시간 특례제도
노사가 합의하면 주 52시간 이상 일할 수 있는 제도. 기존에는 26개 업종이 대상이었으나 지난 2월 법 개정으로 5개 업종이 됐다.
☞11시간 연속 휴게 시간
근로자가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한 뒤 다음 근무할 때까지 최소한 11시간 연속해서 쉴 수 있게 휴게 시간을 보장하는 제도. 예를 들어 월요일 자정에 퇴근한 사람은 화요일 오전 11시 이후에 출근해야 한다. 올 9월부터 특례업종에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