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에 뒤처진다는 소리 듣기 싫어 신조어 따라는 가보는데 날이 갈수록 벽은 높아만 갑니다. 암호 해독 수준의 '초성어'가 쏟아지네요.
김미리(이하 김): '반모 신청해요.' 아이가 유튜브에서 한 채팅을 우연히 봤는데 이런 말이 있는 거예요. 두부 반 모? 반 모임? 도통 감이 안 잡혀 애한테 물어보니 '반말모드'래요. 요즘 애들 보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말이 압축돼 튀어나오는 것 같아요.
오누키(이하 오): 말 줄임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은 좀 더 심한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의 급한 성격 때문에 줄인 말이 많은 거 아닐까요. 말이건 글이건 길면 일단 답답해하니.
김: '카톡'으로도 바로바로 답해야 직성이 풀리죠. 그러니 말이 점점 짧아지고.
오: 일본에서 한국말 배우는 사이트 가면 교재에 안 나오는 줄인 말 뜻 묻는 질문이 가득해요. 'ㅇㅋ(오케이)' 'ㅅㄱ(수고)' 이런 건 기본이죠. 줄인 말 독해 능력이 한국어 마스터의 필수가 됐어요.
김: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뤄진 구조 때문에 한글 줄인 말은 더 암호처럼 보여요. 이전엔 음절을 줄이는 정도였는데 요샌 그마저도 자음 몇 개로 확 줄여버리잖아요. 단어를 이중 압축하는 격이니 해독이 어려워져요.
오: 자음 모음이 도형 같아서 초성어는 외국인들 눈엔 그림처럼 보이기도 해요. 처음에 'ㅇㅇ(응을 줄인 말)'을 봤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선하네요. 숫자 0(영) 두 개인가, 사람 눈 모양인가, 무슨 말일까 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쓰는 걸 쭉 보다가 '응'이란 걸 알게 됐어요.
김: 친구가 요즘 'ㅇㅇ'은 양반이래요. 사춘기 아들한테 길게 톡 보내놓으면 'ㅇ' 딱 하나 온대요. '응'도 아니고, 'ㅇㅇ'도 아니고, 'ㅇ'. 화딱지 나다가도 그래 답해주는 게 어디냐 맘 추스른대요. 한번은 애들 쓴다는 '급식체' 잔뜩 담아 카톡 보냈더니 녀석이 싸하게 하는 말. "엄마, 그러면 젊어 보이는 줄 알아? 급식체 그거 요즘은 아재들이나 써."
오: 일본에선 '와카모노고토바(若者言葉·어린애들 말)'라고 하는데 어른들은 아예 흉내를 안 내요. 괜히 어설프게 썼다가 'KY' 될까 봐.
김: KY?
오: '空氣がよめない(구키가요메나이)'의 줄인 말인데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뜻이에요. 아베 총리가 집권 초기에 분위기 파악 못 해 생긴 말인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이 됐어요.
김: 아, 한글 버전으로 '갑분싸'하고 비슷하네요.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의 줄인 말.
오: 참 'ㄴㅅㄹ'이 뭔지 아세요?
김: 눈사람?
오: 하하. '내 사랑'. 드라마 보다 알게 된 말이에요. 한국에서 중요한 판결 취재하러 법정에 갔는데 옆자리 젊은 남자 기자가 카톡 보내는 걸 우연히 봤어요. 카톡 창에 보이는 자음 세 개. 'ㄴㅅㄹ'. 심각하게 판결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나 웃기던지요. 하기야 그 순간 그에겐 일보다 사랑이 더 중요했을지도(웃음).
김: 이렇게 급속도로 말 줄이다가 한글이 남아날까 모르겠어요. 초성어 보면 낱말 부스러기 같기도 해요.
오: 90년대 쓰던 '삐삐' 생각나세요? 그때 숫자 몇 개로 온갖 말 표현했었죠.
김: 아, 추억의 삐삐. 한국도 그랬죠. 8282(빨리빨리), 1717(일찍일찍), 0124(영원히 사랑해), 505(SOS)….
오: 지금 애들 줄인 말이 삐삐 세대 암호랑 비슷한 거 아닐까요. 그때 우리도 그랬잖아요.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들만의 암호를 쓰는 쾌감. 그러다 어른들까지 쓰면 또 다른 말로 갈아타고.
김: 어제의 신조어는 오늘의 구문이란 말씀. 초성어, 이 또한 지나가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