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갑니다, 선생님! 왕진을 못 가겠다니요…."
1970년 4월 22일 아침 일찍부터 서울 어느 의원에서 의사와 고객의 큰 실랑이가 벌어졌다. 찾아온 사람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가족 2명이 중태에 빠졌다"며 의사에게 집으로 와 달라고 했으나 의사는 난색을 표했다. 간호사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게 이유였다. 가스 중독된 사람 중 청년 1명이 끝내 사망했다. 왕진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의사는 즉각 경찰에 입건됐다(조선일보 1970년 4월 23일 자). "모든 의사는 정당한 이유 없이 환자의 진료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한 의료법을 위반한 죄였다.
환자의 집을 찾아가 진료하는 왕진(往診)이 성행하던 시대에, 의사들은 24시간 내내 출동 대기 상태에 있도록 요구받았다. 응급 환자 이송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도 집 대문을 두드리며 "사람 살려 달라"는 요청이 있으면, 자다 말고 뛰어나가야 했다. 대개 환자 가족이 달려와 의사를 집으로 모셔갔다. 주택가 의원 건물에는 원장의 살림집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아 꼭두새벽에도 의사에게 SOS 보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의술의 역사 초기부터 있었던 왕진은 1970년대 말까지 성행했다. 1930년대엔 개업 의사의 치료 건수 중 30% 정도가 왕진이었다. 1970년대에 일부 부유층은 감기 몸살 등 대수롭지 않은 병에도 몸조리를 위해 의사를 집으로 불렀다. 허정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1973년 "돈 자랑을 하듯 왕진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신문 칼럼을 통해 비판했다.
의사에게 왕진은 힘든 일이었다. 시도 때도 없는 요청에 응한다는 것부터 당장 쉽지 않았다. "왕진 와 달라" "지금 어려우니 환자를 데리고 와라"는 식의 다툼이 잦았다. 시비 끝에 환자 가족이 의사에게 칼부림을 한 일도 있었다. 어떤 의사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꼼수를 썼다. 간호사나 직원, 심지어 자기 아내까지 보내서 진료하게 했다가 환자가 사망한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있었다.
1950~1960년대엔 왕진 요청을 거절당한 끝에 환자가 가끔 숨졌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엄중 단속하겠다"고 경고장을 뽑았고 당국도 채찍을 들었다. 1969년 서울시가 마련한 '접객업소 서비스 향상을 위한 준수사항' 중엔 '주·야간을 막론한 병원의 왕진 치료'가 들어갔다(동아일보 1969년 8월 29일 자). 언론도 왕진 거부한 의사를 '자기 개인의 편리를 위하여 의도(醫道)를 망각한 악덕 의사' '비정한 인술'이라며 비판했다.
의사의 의무였던 왕진은 구급 시스템의 정착과 함께 거의 사라졌다. 왕진이란 젊은 세대들에겐 의미조차 생소한 말이 돼 버렸다. 이 단어가 지난주 언론에 모처럼 등장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장애인 환자들이 급증하자, 정부가 왕진 등 재택 의료 서비스를 활성화하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왕진'이 돌고 돌아 21세기 한국에 다시 소환됐다.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응하도록 하는 게 과제다. 왕진 거부 못하게 경찰까지 나섰던 과거의 '채찍'보다는, 합당한 인센티브를 주는 '당근'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