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까? 그대로 둘까? 그와 그녀의 '털털한' 여름
제모는 남녀의 문제가 아닌, 취향의 문제

미국 면도기 업체 빌리가 선보인 여성용 면도기 광고, 여성의 털을 드러내 화제를 모았다.

올여름 털 고민은 두 갈래로 갈렸다. 면도기와 제모기로 열심히 털을 밀던 여성들은 “왜 제모를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졌고, 급기야 일부 여성은 당당히 털을 드러냈다. 반면, 털을 남성성의 상징으로 여기던 남성들은 매끈한 피부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루밍(Grooming·외모에 투자하는 남자들)족으로 대표되는 남성들은 가정용 제모기로 털을 다듬고, 피부과 시술을 통한 영구 제모도 마다치 않는다.

이들의 태도는 상반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여성과 남성 모두, 제모를 선택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다.

◇ 내 털이 어때서? 털 안 미는 여자들

2012년 영화 ‘러브픽션’에서 공효진은 겨털(겨드랑이털)을 안 미는 여자로 등장했다. 이 영화에서 털은 예쁘고 능력있는 여주인공에 대한 환상을 깨는 장치로 활용됐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였음에도, 여배우의 겨드랑이털은 영화 종영 후에도 한참 동안 회자될 만큼 깊은 인상을 안겼다.

6년 후, 여성의 털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바뀐 듯하다. 여전히 많은 여성이 제모를 하지만, 치마 아래 다리털이 보인다고 공개적으로 핀잔을 듣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 “예의 없다” “관리를 안 한다”라고 지적을 한다면, 구시대적이라고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다.

제모를 하지 않은 여성 모델이 등장한 아디다스 운동화 화보.

여성들의 제모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영국 시장조사기관 민텔에 따르면 2013년 16세에서 24세 여성의 95%가 겨드랑이털을 밀고 92%가 다리털을 깎았지만, 2016년에는 77%와 85%로 각각 떨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bodyhair #bodyhairdontcare #dyedpits 등을 검색하면 당당히 자신의 털을 드러낸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여성의 제모를 당연시하는 분위기에 반대하는 유쾌한 움직임이다. 마일리 사이러스와 마돈나 같은 유명 팝 스타들도 자신의 겨드랑이털 사진을 SNS에 공개해 인식 전환을 주도했다. 국내에서도 ‘천하제일겨털대회’가 개최되는 등 여성 제모를 반대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겨드랑이털과 다리털을 제모하지 않은 지 6개월이 됐다는 대학생 한지영 씨(23, 가명)는 “누구나 털이 나는데, 왜 여자들만 그 털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보기에 여성의 제모는 화장이나 몸매 관리처럼 사회가 여성에게 씌운 코르셋과 다름없다.

제모하는 여성들도 여성 털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털을 밀고 안 밀고를 떠나, 타고난 신체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에 응답한 것이 미국 면도기 업체 빌리(Billie)다. 빌리는 지난 6월 여성의 체모를 드러낸 광고를 공개해 호응을 얻었다. 우리보다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여성의 체모가 광고에 등장한 것은 100년 만이라고. 빌리의 공동 창업주인 조지아나 굴리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의 몸이 털 없이 매끈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체모를 부끄럽게 느끼게 하고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밝혔다.

◇ 내 다리털 어때요? 제모하는 남자들

여성의 반 제모 움직임과 함께 남성들 사이에선 제모가 부상하고 있다. 남성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다리털 상태(?)를 검증받기 위한 남성들이 종종 보인다. 사진과 함께 “제 다리털 어떤가요?”라는 질문엔 “다 미는 건 그렇고, 숱을 치면 깔끔할 듯”이라는 댓글이 달린다.

피부관리를 하고 화장을 하듯 제모 역시 남성 미용의 일부분이 됐다.

피부관리를 하고 화장을 하듯, 제모 역시 남성 미용의 일부분이 됐다. 올리브영에서 지난 6월 다리털 숱을 정리하는 면도기의 매출은 전년 대비 12% 증가했다. 화장품 브랜드 베네피트의 브로우 바(눈썹 관리 매장)를 이용하는 남성 고객도 2015년 1만8000명에서 2016년 4만 명으로 늘었다. 피부과에서 제모 시술을 받는 남성 인구는 연평균 20~30%씩 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들이 털을 관리하는 이유는 깔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다. 직장인 김재현 씨(31)는 “처음엔 제모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털을 관리하니 잘 생겨 보인다는 소릴 들었다. 그 후 주기적으로 왁싱을 한다”고 밝혔다. 몸에 난 털에 부정적인 한국의 문화도 제모를 부추겼다. 이동우 씨(34)는 “서양에선 수염을 기르는 남자를 멋지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염을 기르면 예술가나 사회 부적응자로 본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선 단정함을 유지하는 게 좋다”라고 했다.

남성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탓도 있다. 털이 남성성을 상징한다는 말은 옛말, 요즘 웬만한 남자 연예인을 봐도 매끈한 다리와 겨드랑이 일색이다. 한 남자아이돌 그룹 멤버는 다리 왁싱을 하고 다리 자신감이 생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털 같은 신체적 특징으로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 재력과 능력 같은 사회적 특징으로 남성성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지적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쓰는 립스틱을 선보인 라카.

제모를 남녀 문제가 아닌 개인의 취향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패션 업계에선 젠더리스(Genderless·성별의 구분이 없는 패션) 트렌드가 수년째 이어지면서 옷 입기의 고정관념이 깨졌다. 구찌는 성 중립적 스타일로 매출을 올렸고, 톰브라운은 치마를 남성 패션쇼에 세웠다. 자라와 H&M 등도 성별의 구분 없는 옷을 내놓았다. 미용 업계의 변화도 주목된다. 남녀가 함께 바르는 립스틱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 면도기 스타트업은 성 중립 면도기를 내놨다. 남자든 여자든 입술에 생기가 필요하면 바르고, 제모를 하고 싶으면 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