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시작한 이래 이런 피해는 처음"
축구장 900개 크기 밭에서 작물피해
노지 생산품은 폭등, 하우스는 안정
“복숭아 키우면 비가 무섭지, 해가 무섭지는 않아요. 복숭아는 비가 오면 썩거든. 해가 이글이글 거리면 그 해는 작황이 좋아요. 그런데 올해는… 복숭아가 새카맣고 쪼글쪼글해져서 떨어져. 15년 복숭아 키우면서 이런 적이 처음이야.”
과수원 사잇길에 복숭아가 굴러다녔다. 떨어진 복숭아는 불에 태운 것처럼 한쪽 면이 시커멓게 변해있다. 복숭아는 더위가 약이다. 더울수록 당도가 높아진다. 그런 복숭아도 폭염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과수원에는 낙과(落果) 바구니가 그득했다. 복숭아나무 10그루는 줄기까지 말라붙어 고사(枯死)했다. 경기 이천시 설성면 장천리에 위치한 한울농원 주인 강희기(59)씨와 김금선(59)씨 부부는 “이런 여름은 처음”이라고 했다.
◇더울수록 당도 높아지는 복숭아 '화상' 입고 떨어진다
지난 2일 새벽 5시, 기자가 이 농장을 찾았을 때, 부부는 막 작업을 시작하는 참이었다. 해가 솟은 후에는 야외작업이 불가능해 두 시간만 딴다. "한낮에 이런 중노동(수확)했다가는 정말로 죽습니다." 강씨가 말했다. 이날 이천의 낮 최고온도는 38.7도까지 치솟았다.
한울농원에서는 300여그루의 복숭아나무를 키운다. 애지중지 물을 줘도 말라 죽은 나무가 10그루. 고사한 나무는 가지가 양옆으로 쩍 벌어진 채로 앙상했다.
수확한 복숭아도 이후에 폐기하기 일쑤다. 이날 수확한 복숭아는 1000여개, 이 가운데 300여개를 버렸다. 멀쩡해 보여도, 들여다보면 과육에 크고 작은 일소(日燒·과실 표면이 강한 햇빛에 노출돼 화상을 입는 현상)자국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아예 따지도 못하고 바닥에 버려진 낙과는 60여개. 김씨가 “낙과까지 포함하면 올해 수확률은 평년의 절반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가뜩이나 올해 늦은 봄, 복숭아 꽃이 필 시기에 이상저온으로 냉해를 입어 피해가 컸는데, 엎친 데 덮쳐 이번에는 폭염까지 닥쳤다”면서 “물주머니처럼 물렁물렁한 복숭아를 딸 때마다 속이 쓰리다”고 했다. 한울농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날 만난 이천의 다른 복숭아 농장들도 “작황이 이 지경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천시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올해 이천 복숭아 작황은 예년보다 30~40% 줄었다.
◇폭염에 축구장 929개 작물피해 입었다
복숭아뿐 아니다. 사과, 배추, 고추 할 것 없이 폭염 피해가 심각하다. 과일은 직사광선에 맞아 화상을 입고, 채소는 수분 부족으로 말라비틀어진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2만여평(약 6만6000㎡)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는 엄광일(55)씨는 아예 올해 수확을 포기했다. “25년 배추 기르는데 이런 적이 없었어요. 한 해 기른 배추가 속까지 타들어 가 수확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경북 영천에서 2500여평(약 8300㎡) 규모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최모(63)씨도 올해 거둔 사과 80%가 ‘화상’ 피해를 입었다. 그는 “빨리 더위가 가시고 시원한 비가 내리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3일 현재 포도·사과·복숭아 등 과수원에서 310.1ha(헥타르), 고추·배추 등 채소밭에서 132.4ha의 폭염 피해가 신고됐다. 인삼밭(118.6ha) 등 전국 모든 작물 피해를 합하면 678.3ha에 달한다. 올해 축구장 929개 크기의 밭에서 작물피해를 입은 것이다.
폭염 피해로 농작물 가격도 출렁이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폭염으로 배추·무·건고추 가격이 평년(7월 하순 기준) 대비 폭등했다. 출하량이 급격히 떨어진 까닭이다. 지난달 30일 기준 배추 한 포기 소매 가격은 5030원으로, 평년(3130원)보다 갑절 이상(60.7%) 값이 올랐다. 무는 평년보다 39.6% 비싼 2772원, 건고추(600g 기준)는 평년보다 63.3% 비싼 1만6290원에 달한다. 맨땅에서 키우는 노지(露地) 채소가 폭염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시설채소’는 피해가 덜하다. 비닐하우스가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스프링클러 등으로 수분공급을 해줘 폭염 피해가 적은 것이다. 실제 애호박은 올해 도리어 생산량이 상승하면서 개당 862원에 팔린다. 평년 대비 가격이 29% 떨어졌다.
여름이 제철인 수박은 무더위에 수요가 늘었다. 수박 한 개 소매가격은 평년보다 27.6% 비싼 2만1843원이다. 지난 1일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축·수산물 수급 불안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비상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