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운동권들은 '거리 혁명'에서 '선거 혁명'으로 전환했고, 그중 다수파는 김대중, 김영삼과의 연합을, 소수파는 '독자 노선'을 택했다. 전자(前者)가 김근태, 이해찬 등 재야파와 전대협 출신들이고, 후자(後者)가 노회찬, 주대환 등 '진보정당파'였다.
노회찬 의원은 그렇게 '혁명가'에서 '정치인'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았다. 그는 기존 야당에 젊은 피로 영입되는 손쉬운 방식 대신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지금이야 진보 정당이 낯설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왜 소수파가 독자 정당을 만들어 보수 정당만 도와주느냐"는 비판이 드셌다. 노회찬 같은 '독자파'들은 운동권에서는 '분열주의자'로, 보수 정파에서는 '좌파'로 비판받았다.
필자가 노회찬을 처음 만난 건 그가 의원 한 명 없는 정당의 사무총장이었을 때였다. 2004년 4월 16일 새벽, 김종필 전 총리와 당락(當落)의 희비가 엇갈리며 원내에 진입하는 모습도 옆에서 지켜봤다. 그는 필자를 '우리 편, 남의 편' 기자가 아닌 그냥 '기자'로 대했다. '언론 개혁'을 하겠다던 당시 여당의 한 정치인은 기자가 건넨 명함을 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는데, 노회찬은 달랐다.
'심야 취재' 명분으로 그의 강서구 자택(自宅)을 불쑥 찾아갔지만, 노 의원과 그의 아내는 "우리 집에 찾아온 첫 기자"라며 활짝 문을 열어줬다. 며칠 후 그에게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강연 한번 해달라"고 청했다.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더라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통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는 참모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연을 했다. 다만 "조선일보에도 노조가 있을 테니, 노조에 가서 강연하겠다"고 했다. 강연 이후 당시 친여(親與) 인사들로부터 "언론 개혁에 대한 개념도 없다"는 호된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웃어넘겼다.
2006년 민주노동당 내 일부 인사들이 연루된 '일심회 사건'이 터지고, 종북 논쟁을 거쳐 진보신당이라는 '미니 정당'을 이끌 때 그를 다시 만났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였다. 2005년 "금연하니 라면 국물의 깊은 맛을 알게 됐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깨는 처졌지만 "다시 잘될 것"이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두 번 더 국회의원을 했고 그의 정당은 현재 제1 야당과 비슷한 지지율로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3선 의원 노회찬은 정치자금의 '벽'을 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정치를 참 어렵게 했다. '진보 정당' 간판을 내걸었지만, 반대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하는 편한 방식으로 정치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이것임을 보여주려 했다. 그의 재담과 촌철살인은 그래서 말장난이 아니라 고민의 산물이었다. 이런 정책을 만들고 사람을 모아 조직하는 일을 함께 했던 이재영과 오재영 등 그의 동료들은 젊은 나이에 노회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들 상가(喪家)에서 "내가 고생시켜 죽었다"며 괴로워하던 모습이 선하다. 어쩌면 남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돌리던 그 마음이 비수가 되어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노회찬과 그의 정치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는 사람마다 입장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그의 빈소를 찾는 것은 생전에 그가 보여준 인간미와 편협하지 않은 정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노회찬, 그의 심장은 분명히 왼쪽에서 뛰었지만 두 눈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