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가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맨손으로 구조 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을 목숨을 구했던 ‘하얀 헬멧(White Helmets)’도 결국 시리아를 떠났다.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반군 주둔지인 남서부 지역 장악을 눈앞에 두고 이들의 목을 죄여왔기 때문이다.

22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하얀 헬멧 대원과 가족 등 422명을 요르단으로 대피시켰다고 밝혔다. 이들은 요르단에서 최대 3개월 간 임시로 머문 뒤 캐나다와 영국, 독일 등으로 이주할 예정이다. 캐나다는 하얀 헬멧 대원과 가족들 250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순수 자원봉사자들로 이뤄진 시리아 민간 구호 단체 하얀 헬멧 대원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있다.

하얀 헬멧은 2012년 시리아 시민들이 스스로 결성한 구호 단체다. 하얀 헬멧 대원들은 정부군이 공습과 포격을 퍼붓는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갔다. 이들은 지금까지 10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시리아 시민 스스로 설립한 민간 구호 단체 ‘하얀 헬멧’

시리아 내전은 2011년 시작돼 지금까지 8년 간 이어지고 있다.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은 시리아 국민들이 2011년 대규모 평화시위를 벌였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퇴진을 거부하고 시위대를 난폭하게 진압했다. 분노한 국민들은 반격에 나섰고,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치열한 내전이 시작됐다.

내전이 격화된 2012년, 국제구호단체들마저 시리아를 빠져나가갔고, 민간인들은 계속된 공습과 폭격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이를 두고볼 수만 없었던 일부 시리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구조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하얀 헬멧의 시작이었다.

하얀 헬멧은 ‘시리아 민방위’라는 이름으로 2014년 정식 설립됐다. 구조에 참여한 대원들은 원래 전자제품 판매 상인, 교사, 제빵사, 대학생, 택시 운전사 등으로 일하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시리아 알레포 지역에 살던 5살 꼬마 옴란 다크니시가 하얀 헬멧에게 구조된 후 먼지와 피 범벅이 된 채 망연자실 앉아 있다.

본격 구조 활동을 시작한 하얀 헬멧 대원들은 국제구호단체의 도움으로 터키 등지에서 긴급구조훈련을 받았다. 이스라엘 매체 하레츠에 따르면, 하얀 헬멧이 정식 설립된 후 구조 활동에 자원하는 사람들은 계속 늘었고, 현재 약 3000여 명의 대원이 하얀 헬멧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등 국제 사회와 구호 단체들이 하얀 헬멧에 연간 3000만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지원했고, 전 세계인들의 기부도 잇따랐다.

하얀 헬멧 대원들은 공습이나 폭격이 발생한 지역에 달려가 건물 잔해 등에 깔린 부상자들을 맨손과 삽으로 구출했다. 하얀 헬멧 대원들이 지난해 시리아 알레포에서 구한 5살 꼬마 옴란 다크니시로 인해 시리아 내전이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하얀 헬멧은 지금까지 11만50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희생도 뒤따랐다. 200여 명이 넘는 대원들이 구조 활동 도중 숨졌고, 5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얀 헬멧은 희생 정신과 인도주의를 실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아울러 넷플릭스와 BBC 등에서는 하얀 헬멧의 활약을 담은 프로그램이 제작되기도 했다.

◇ 전쟁 참상 고발…시리아·러시아 “하얀 헬멧, 테러 단체 연관”

하얀 헬멧은 구조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전쟁의 참상과 시리아 정부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고발하는 역할도 했다. 하얀 헬멧 대표인 라이드 알 살레는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 벨레(DW)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전쟁터에) 갇혀 있다. 군중이 모여 있는 곳은 물론, 의료 시설까지 매일 폭격을 받는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수년 간 시리아 정부에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시민들의 목숨을 구할 해결책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아직도 ‘항복 아니면 굶주림’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유니세프(UNICEF)는 시리아 반군 거점인 동(東)구타 지역 5세 미만 아동 중 11.9%가 심각한 영양 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하얀 헬멧대원들이 공습으로 무너진 폐허 속에서 생존자를 구조하고 있다.

하얀 헬멧은 민간인 구조를 위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살레 대표는 “민간인을 포위한 이들에게 (국제 사회가) 압력을 가해야 한다”며 “인도주의적으로 그들(시리아 정부)은 민간인의 탈출로를 열고, 최악의 상황에서 의료 시설로 후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훈련과 장비 지원도 절실한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시리아 정부에게 하얀 헬멧의 활동은 눈엣가시였다. 아사드 정권과 그들을 지원하는 러시아 정부는 하얀 헬멧이 테러 단체와 연관됐다고 주장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시리아와 러시아 정부, 언론은 인터넷 사이트와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하얀 헬멧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인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와 연계한 단체이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화학 무기 공격과 납치 등을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NYT는 “(하얀 헬멧이 테러 조직과 연관됐다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전했다.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2017년 2월 28일 트위터에 “하얀 헬멧은 구조 대원이 아닌 ‘아젠다(의제)’를 전달하는 배우”라며 하얀 헬멧 대원이 오스카상 트로피를 들고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있는 모습의 그림을 올렸다. 러시아는 하얀 헬멧이 알카에다 등 테러 조직과 연관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디언은 지난해 12월 “하얀 헬멧이 온라인 선전 기계의 희생자가 됐다”며 온라인에서 하얀 헬멧 관련 ‘루머’가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했다. 매체는 가짜 뉴스(Fake news)가 확산되는 경로를 시각화하는 ‘혹시(Hoaxy)‘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하얀 헬멧을 검색했을 때 노출된 수백가지의 허위 정보들이 같은 출처에서 생산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데이터 분석업체 ‘그래피카(Graphika)’는 하얀 헬멧을 자주 언급하는 트위터 계정 중 1만4000개의 행동 패턴이 ‘매우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이들 중에는 친(親) 러시아 성향의 ‘트롤’ 계정이 많이 포함됐다고 했다. 트롤은 SNS 등에 선동적이거나 자극적인 글을 올려 분쟁을 조장하는 사용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 계정은 하얀 헬멧에 관한 부정적인 글을 하루에 150여 개 이상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 국제 사회 ‘공조’로 하얀 헬멧 대원·가족 422명 탈출

내전은 계속됐다. 시리아 주변 중동 국가들을 비롯한 러시아와 미국 등이 자국 이권에 따라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를 등에 업은 시리아 정부군은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반군 거점을 차례로 정복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이달 초부터 남서부 지역 마지막 반군 거점인 다라 지역을 포위하고 대규모 공습과 포격을 퍼부었다.

하얀 헬멧 대원들도 탈출로가 끊긴 채 시리아 남서부 다라, 쿠네이트라 등 지역에 포위돼 있었다. 이에 국제 사회가 이들을 구하기 위한 공조에 나섰다.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독일 등 서방 국가들은 하얀 헬멧 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에 협조를 요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 등 각국 정상들은 지난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 회의에서 하얀 헬멧 대원들의 대피와 관련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군은 21일 밤 9시 30분부터 시리아 남서부 지역에 인접한 골란 고원을 통해 하얀 헬멧 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탈출시켰다. 이들은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해 22일 새벽 5시쯤 요르단으로 들어갔다. 요르단 외교부에 따르면, 이날 하얀 헬멧 대원과 가족 총 422명이 구출됐다. 탈출을 거부한 하얀 헬멧 대원들은 시리아에 남아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 군인이 2018년 7월 21일 시리아 남서부 지역을 탈출해 요르단으로 향하는 버스에 탄 하얀 헬멧 대원들과 가족들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성명을 내고 “최근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각국 지도자들이 하얀 헬멧 대원을 시리아에서 구출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하얀 헬멧 대원들 자신이 치명적인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인도주의에 입각해 그들을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나라로 대피시키는 작전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도 성명에서 “영국은 국제 사회와 공조를 통해 하얀 헬멧 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안전하게 시리아에서 탈출시켰다”며 “11만5000여 명의 목숨을 구한 하얀 헬멧은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아 (시리아 정부군의) 공격 대상이 됐고, 우리는 이들을 즉각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분쟁 속에서 시리아인들을 구한 하얀 헬멧 봉사자들의 용감하고 이타적인 행위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요르단 정부는 탈출한 하얀 헬멧 대원들과 그 가족들이 최장 3개월 간 요르단에 임시 체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들은 앞으로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 영국, 독일 등으로 이주할 예정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캐나다는 이들 중 250명, 독일은 50여 명의 망명을 수용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러시아는 여전히 하얀 헬멧 관련 ‘음모론’을 펼쳤다. 네덜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이날 트위터에 “악명 높은 하얀 헬멧은 서방 국가들에 의해 강제로 철수했다”며 “시리아에서 더 이상 화학 무기를 활용한 새로운 공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