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남학생들이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 '메갈년' '김치녀' '쿵쾅쿵쾅(뚱뚱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혐오 표현도 학교 폭력으로 처리할 수 없을까요?"
지난 18일 오후 4시 서울 강북구 삼각산고 도서관. 한 여학생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그 말을 듣고 남학생들에게 따지지 않느냐"고 묻자 여학생은 "한 명이 아니라 열 명 넘는 남학생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이날 정 장관은 중·고교생과 교사 15명과 만나 학교에서 사용하는 성차별 언어 실태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학생들은 "다양한 혐오 표현이 청소년 사이에 퍼지고 있다. 장관님이 신경 써주시면 좋겠다" "교복이 너무 작고 몸에 껴서 남학생들로부터 몸매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정 장관은 난감한 듯 "얼마 전 장관회의에선 여학생들이 원해 교복이 작게 나오는 거라던데…"라고 했다.
정 장관은 1년 전 취임 직후 "여가부가 앞으로 남녀 갈등을 해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성 차별 철폐를 외치는 '혜화역 시위'에 수만명이 몰리고, 충격적 온라인 혐오 게시물이 갈수록 늘어나는 등 남혐·여혐 현상은 오히려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정 장관이 혜화역 시위를 참관한 소감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극렬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장관을 경질하라'는 청와대 청원에 6만여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남녀 갈등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시민 수만명이 거리에 나와 성에 관련된 혐오 표현을 외치는 현상은 이례적"이라고 말한다.
여가부는 지난 1년간 주로 혐오 표현에 대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성차별 언어 개선 캠페인을 벌였다. 남녀 혐오 문화가 언어를 통해 확산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혐오 표현을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지'도 검토했다. '여성 혐오 표현 규제 방안'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어 호주·스코틀랜드·핀란드 등의 사례를 살펴봤지만 여성 혐오 표현에 대한 금지 규정을 만들어 처벌하는 나라는 없었다. 혐오 표현을 규제할 뾰족한 방법을 못 찾은 것이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도 지난 3월 의원 자격으로 '혐오 표현 규제 법안'을 발의했다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철회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남녀 간 갈등 현상이 더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달 전 1만2000명으로 시작한 혜화역 집회는 지난 7일 주최 측 추산 6만명(경찰 추산 1만9000명)으로 불어났다. 혐오 표현의 수위도 갈수록 올라가고 있다.
여가부는 "앞으로 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한편에선 정부가 남녀 간 갈등의 본질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안 하고 '혐오 표현'이나 규제하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 교수는 "여혐·남혐 현상은 여권이 빠르게 신장됐는데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반발하면서 나오는 현상"이라며 "여혐·남혐을 해결하려 정부가 규범을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남성들이 반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