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미스코리아 진(眞). 김성령(51)은 연예계로 직행했다. 영화 데뷔작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로 대종상과 백상 신인상을 받았다. 여전히 20·30대도 기죽을 미모와 몸매다. 그런데 "억울하다"고 했다.
그녀는 미스코리아 30주년 인터뷰에서 "그 타이틀이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며 "배우로서 뭔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감회를 밝혔다. 선입견과 투쟁해온 30년이었다. 출연작은 드라마·영화·연극 등 70여편. 김성령은 "만족하는 작품은 드라마 '왕과 비'(1998) '추적자'(2012) 정도다. 연기자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했다. "촬영장엔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일이 비일비재해요. '내가 더 잘하면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출산 두 번을 빼면 쉬지 않고 일했지요. 선택할 때마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미스코리아는 자긍심이자 콤플렉스
미스코리아가 된 지 꼭 30년 된 지난 5월 21일 김성령을 만났다. 그 사실을 일러주자 "맞아요! 대박!"이라며 반색했다. 지난 4일 열린 올해 미스코리아 대회에서는 역대 미스코리아 중 처음으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한 인터뷰에서 '미스코리아라 자랑스럽지만 때론 숨기고 싶다'고 했는데.
"반듯한 이미지가 부담스러웠어요. 때론 흐트러지고 싶거든요. 처음엔 그것에 짓눌렸는데 사실 이 바닥에 들어올 때부터 제 근본이잖아요. 받아들여야죠. 아직도 미스코리아로 봐주신다는 게 고맙고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더군요.
"망가지려고 나가진 않아요. 대본을 따라가야 하는 연기에 비하면 좀 더 자유롭고 솔직하죠. 돌발 상황을 즐길 수도 있어요."
―순발력이 있던걸요.
"다 편집해서 그래요(웃음)."
―배우들은 어떤 결핍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지요.
"만족이 안 돼요.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 연기할 때가 결혼 직후였는데 이불 뒤집어쓴 채 소리 지르고 울면서 대사를 연습했어요. 정신 나간 사람 같았겠지요. 그런 터닝 포인트가 너무 가끔 와요. 남편은 저를 '못다 핀 연예인'이라고 놀렸어요. 이젠 존중해주고 '실검 1위 찍었다'고 먼저 알려주지만."
―작품 고르는 기준이라면.
"제가 잘할 수 있거나 김은숙 작가의 '상속자들'처럼 흥할 작품을 해요. 좋은 제작진이 있는 현장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에요. 박찬욱·봉준호 같은 훌륭한 감독들과 일하려면 제가 더 발전해야죠."
―혹시 그래서 억울한 건가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좀 더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누군들 아침 드라마만 하고 싶을까요. 아침 드라마는 막장으로 가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시청률이 안 올라요. 저 또한 감정 소비일 뿐이고요."
충무로에는 '김성령은 노출을 안 한다'는 말이 있다. 그녀는 정색했다. "신인 감독이라면 제가 소비될까 봐 불안하겠지만, 봉준호·박찬욱 감독이라면 해야죠. '배우로 안 보이나' 싶어 서러울 때가 많았어요."
"폭이 넓고 높낮이도 큰 배우로"
1987년 스무 살 때 꿈은 TV 리포터였다. 어머니 친구가 소개해준 디자이너를 만났더니 "네가 무슨 리포터니, 미스코리아다 미스코리아"라며 명동 세리미용실로 데려갔다. 김성령은 "그해엔 거절했다가 이듬해 급하게 출전했는데, 진선미만 남았을 때 내가 진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모든 카메라가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미스코리아가 연기 생활에 준 명암도 있겠지요.
"득이 더 많죠. 실이라면 선입견 만든 거? 나라를 대표하는 미인이고 모범적이어야 하니까요. 속박이고 부담이었죠. 후배 (고)현정이는 그 이미지를 깨고 자유분방해졌어요."
―영화 '독전'에선 조직의 보스였는데.
"독한 놈보다 더 독한 캐릭터라서 끌렸어요. 분량은 짧지만 존재감이 있고요. 드라마 '미세스 캅'을 해봐서 와이어 액션 유경험자예요(웃음)."
―제안은 드라마가 대부분인가요?
"80%는 드라마예요. 생활 연기나 재벌 부인은 질렸어요."
―기다리는 배역이 따로 있습니까.
"광기에 사로잡힌 악역이나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인물이랄까요. 이야기에 미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험, 제 모든 걸 깊숙이 담글 수 있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에서는 과학자를 연기하는데.
"그냥 배우 (서)강준이 엄마예요. 연기할 땐 그 인물에 100% 공감해야 해요.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연기하면 구멍이 보여요."
―박찬욱·봉준호 감독에게 한마디 한다면.
"그동안 '미스코리아' '동안(童顔)' '럭셔리(고급스럽다는 뜻)'라는 꼬리표가 붙었어요. 거기서 빛이 났고요. 앞으론 배우다운 모습을 찾을 겁니다. 영화 '아가씨'에서 저를 검토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누굴 원망할 수만은 없지요. 제가 변하려고요. 폭이 넓고 높낮이도 큰 배우로."
―별명이 '화장품 CF계의 송해'인데.
"'언니처럼 나이 들고 싶어요' '우리도 저렇게 늙자'라는 말을 듣다가 어느 순간 사명감이 생겼어요. 롤모델이 되어보자. 40·50대 여성에게 '포기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50대는 또 다릅니까.
"전에는 화장 안 지우고 잤어요. '언니 오늘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 묻는데 제가 '야, 나 오늘 세수도 안 했어' 할 때가 많았거든요. 50대는 그게 안 돼요. 철저히 노력하지 않으면 처지고 퍼지고 늙어요."
―아직도 불안한가요?
"'현장이 행복하다'는 배우와 달리 저는 촬영 전날부터 잠이 안 와요. '연기는 죽을 때까지 답이 없다'고 하신 윤여정 선생님한테 위로를 받았어요."
화두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더 주도적으로 확신을 갖고 살 것"이라고 했다. "인정받지 않아도 돼요. 제가 만족하는 배우가 될래요. '이걸 하면 빛이 나겠지, 광고주가 좋아하겠지' 같은 생각은 버렸어요. 비상업적인 영화라도, 크든 작든 배역에 끌리면 저질러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