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동그랗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 새까만 눈동자가 움직일 때면 '또르륵' 소리가 날 것만 같다. 6·25에 참전한 터키 군인이 전쟁터에서 우리나라 고아를 구해주고 키워준 실제 사연을 담은 터키 영화 '아일라'(감독 잔 울카이)에서 주인공 아일라를 연기한 여덟 살짜리 아역 배우 김설 얘기다. 김설은 2014년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에서 덕수(엄지성·황정민)의 막냇동생 '끝순' 역할로 데뷔했다. 2015년엔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진주' 역할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따 엄마랑 문방구 갈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요.” 영화 ‘아일라’ 주인공 김설이 배시시 웃었다. 두 볼이 설렘으로 부풀었다.

지난달 말 서울 신림동에서 만난 김설은 그러나 스스로를 "인천산곡남초등학교 1학년 1반 13번입니다"라고 소개했다. "13번은 키 순서로 받은 번호냐"고 묻자 동그란 눈동자가 단호해진다. "아뇨! 키는 제가 제일 커요(웃음)." 말끝에 '헤'하고 웃자 앞니 두 개가 빠진 분홍빛 잇몸이 천진하게 드러났다.

설이가 영화 '아일라'를 찍은 건 2016년 말부터 작년 6월까지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터키에서는 3개월쯤 촬영했다. 이 영화에서 평안북도 군우리처럼 우리나라 전쟁터로 묘사되는 대부분의 배경지가 실은 터키다. 한국 로케이션 촬영을 하면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선택한 방식이었다. 설이는 엄마와 함께 터키 이스탄불을 오가며 3개월 동안 현지 스태프들과 함께 지냈다. 낯선 외국 생활이 아이에게 힘들진 않았을까? 설이는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재밌었어요. 터키 감독님이 저한테 인형도 많이 사주셨어요. 터키 양고기랑 미트볼도 맛있었고요."

영화 ‘아일라’에서 전쟁고아로 나오는 김설이 터키 병사 술레이만과 함께 있는 모습.

아일라는 한국에 참전한 터키 병사가 부대에서 키운 아이인 만큼 대사 대부분이 터키말이다. 설이는 "화장실이랑 벽에 터키 대사를 한국말로 적어놓고 틈나는 대로 외웠다"고 했다. 발음이 헷갈릴 땐 터키어 선생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해서 물어보곤 했다. "자꾸자꾸 읽으니까 외워졌어요. 터키 군인 아저씨를 연기했던 이스마일 아저씨가 착해서 많이 도와줬고요."

아이의 고집으로 영화 완성도가 뜻밖에 높아진 장면도 있다. 영화에서 술레이만 병사는 아일라를 한국 민간인 시체 더미 위에서 발견한다. 애초 잔 울카이 감독은 설이에게 "소리 내지 말고 눈물만 흘려 달라"고 부탁했으나 설이는 끝끝내 "울고 싶지 않다"고 우겼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안 울고 싶었어요." 촬영장에서 말을 잘 알아듣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설이에겐 거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장면은 시체 더미 속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앉아 있는 아일라를 술레이만이 발견하는 것으로 찍혔다. 설이 어머니는 "촬영이 끝날 무렵 잔 울카이 감독이 '설이가 맞았다. 그 상황에서 아일라는 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고 하셨어요. 저는 설이가 왜 우겼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이 나름의 직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라고 했다.

평소엔 그래도 천진한 아이다. 설이는 인터뷰 끝날 무렵에 "집에 가다가 문방구에 들르고 싶다"고 했다. "유니콘이 그려진 쿠션을 봤어요. 그걸 사려고요." 아이 양볼이 다시 미소로 동그랗게 부풀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