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수 선수 문신한 팔을 제거해 주세요.'
한국과 멕시코의 러시아월드컵 조별 리그 2차전이 치러진 지난 24일 새벽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한국 대표팀 중앙 수비수 장현수(27)를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경기 중 장현수가 태클을 시도하다 공이 손에 닿자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했고, 결국 실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장현수를 국외 추방하라'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태형을 건의한다' '장현수 가족까지 추방해 달라'는 극단적인 내용의 청원이 100여 건 올라왔다.
앞서 지난 18일 한국과 스웨덴전에서 1:0으로 패한 직후에도 청원 게시판은 '화풀이 공간'으로 변했다. '스웨덴과 전쟁을 청원한다' 등 황당한 청원이 1000여 건에 달했다. 한국 대표팀에 페널티킥을 선언한 경기 주심 호엘 아길라르에 대해 '아길라르를 사형해 달라' '스웨덴으로부터 돈을 먹었는지 계좌 추적하라'는 욕설 섞인 글도 연이어 올라왔다. 불똥은 스웨덴 가구회사인 이케아(IKEA)에도 튀었다. '더러운 기업 이케아 세무조사를 요청한다'는 글이 수십 건에 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특정 인물이나 단체 등에 대한 '도 넘은 비난' 글이 넘치고 있지만 청와대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취지로 국민청원 게시판을 신설한 청와대는 '소년법 개정' '낙태죄 폐지' 등 20만 명 이상 참여한 청원 36개에 대해 답변했고, 일부는 실제 정책으로 반영됐다.
그러나 익명으로 손쉽게 글을 올릴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욕설과 혐오적 표현을 담은 글이 무더기로 게시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앞서 지난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스피드스케이팅 김보름 선수의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는 60만 명이 몰렸다. 댓글 상당수는 욕설과 비하적 표현이었다. 3개월 뒤 문체부와 빙상연맹은 조사를 벌여 고의성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석 달 동안 '왕따 가해자'로 몰린 김 선수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 게시판이 온라인 테러의 장으로 변질됐다' '악플이 난무하는 네이버·다음 등 인터넷 포털의 댓글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원 게시판의 역기능이 부각되자 최근엔 '국민청원 사이트를 폐쇄해 달라' '실명으로 운영해 달라'는 청원도 늘고 있다. 청와대는 욕설 및 비속어 사용, 중복 게시 등을 청원 삭제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욕설과 비하 등 상당수 글은 그대로 방치돼 있다. 청원 게시판을 담당하는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은 지난달 30일 "청원 게시판이 '놀이터'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분노를 털어놓을 곳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나 게시판이 사실상 '분노와 욕설의 배설구'로 변질되고 있는데도 청와대가 '표현의 자유'만 강조하며 사실상 손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 때문에 '청원' 취지를 살리기 위해 청원 실명제와 신고 기능 등 구체적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현재로선 게시판 운영 기준을 변경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