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니 아버지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어요. 요즘엔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풍경을 봐도 아버지 생각이 나니까요. 그때마다 여기가 쿡쿡 쑤시고 아파요." 김은자(74)씨가 명치 끝을 가리켰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렇게 울까 봐 인터뷰 안 하겠다고 했는데…."

김은자씨는 지난 21일 국내 개봉한 터키 영화 '아일라'에 등장하는 6·25 전쟁고아의 실제 인물이다. 지난 19일 서울 용산에서 만난 김씨는 "영화 덕분에 터키도 가고 미국도 갔다. 외국 방송사와 인터뷰도 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어리둥절하다가도 아버지 생각하면 목이 멘다"고 했다.

19일 극장에서 만난 김은자씨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 얘기가 영화가 됐다니 민망하지만, 술레이만 같은 분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해요.” 어릴 적 술레이만씨와 찍은 사진을 들고 있었다.

김씨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6·25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터키 군인 술레이만 딜빌리이 하사다. 북한군 폭격에 친부모를 잃고 거리에 울며 서 있는 김씨를 술레이만 하사가 발견하고 부대로 데려갔다. 아이는 부모와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섯 살쯤으로 추측됐을 뿐이다.

술레이만씨는 그에게 '아일라'라는 터키 이름을 붙여주고 부대에서 키웠다. 김씨는 술레이만씨를 '바바(아버지의 터키어)'라 부르며 따랐다. 휴전 무렵 귀국 명령을 받자 술레이만씨는 아일라를 궤짝에 넣어 몰래 터키에 데려가려 했으나 실패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 김씨는 터키 군인들이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경기 수원시 앙카라 학원에 맡겨졌다.

'아일라' 대신 김은자라는 이름도 앙카라 학원에서 얻었다. 2010년 국내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두 사람 사연이 알려졌고, 터키의 잔 울카이 감독이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 '아일라'다. 작년 터키에서 500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영화 ‘아일라’의 한 장면. 고아 소녀 아일라를 안고 터키 군인 술레이만이 춤을 추고 있다.

김씨는 2010년 방송사 주선으로 서울 영등포 앙카라공원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왜 이제야 날 찾았느냐'고만 했다. 아버지는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술레이만씨 집에도 갔다. 아버지는 6·25 당시 찍었던 아일라 사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술레이만씨는 작년 12월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김씨 경험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김씨는 술레이만씨와 동료 군인들이 자신을 지프차에 태우고 다녔던 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버지는 담요로 코트를 지어줬고, 제 몫의 빵과 우유를 항상 챙겨놓으셨어요. 제가 터키어를 배워 한국 사람과 터키 군인들 사이에서 어설프게나마 통역도 했고요."

김씨는 24세에 결혼했지만 남편을 사고로 일찍 여의고 홀로 아이를 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매일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고 했다. 김씨는 "오늘도 몇 줄 쓰고 나왔다"면서 가만히 그 내용을 읊었다. "잘 계시죠, 아버지. 전 오늘 인터뷰가 있어요. 울고 싶지 않은데 얘기하다 보면 울 것 같네요…." 말끝에 그가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