엷은 무지갯빛을 띠며 바다에 떠다니는 기름. 고의로 내다 버린 폐유인지 사고로 흘러나온 기름인지 알기 어렵다. 여름이 되면 이런 출처가 불분명한 기름 오염이 부쩍 늘어난다. 최근 3년간 월평균 해상 오염 신고 건수는 6월 393건, 7월 411건, 8월 358건. 월평균 60여 건에 그치는 겨울철과 비교하면 5배 넘게 많다.
이유는 뭘까. 해양경찰청은 여름철 어선 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 그만큼 오염 물질을 몰래 바다에 흘려보내는 '양심 불량' 어선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배에서 나오는 폐유는 해양환경관리법에 따라 일단 배 안에 모아뒀다가 해양환경공단에서 운영하는 해양환경사업소나 민간 처리업체에 돈을 주고 처리해야 한다. 전국 주요 항만에 설치된 13개 해양환경사업소가 연평균 약 9000t을 수거하고, 이곳과 먼 지역은 지역 수협·어촌계에서 수거 시설을 운영한다.
비용은 오염 물질마다 다르다. '빌지(bilge)'로 불리는 선저폐수(선박 엔진이 가동될 때 아래로 떨어진 기름과 선박 내부에 있던 물이 섞여 만들어진 유성혼합물)는 ㎥당 2만5000원. 외국 항구를 오가는 선박이나 외국인 소유 선박은 가산 요금(선저폐수 ㎥당 5만5000원)이 붙는다. 민간업체는 t당 10만원 수준으로 몇 배 더 비싸다. 해경 오염방제국 관계자는 "폐유 처리 비용 자체는 비싸지 않은 편이지만, 조업 시간을 벌고 처리 비용을 아끼려는 배들이 단속을 피해 몰래 버리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기름 유출 뺑소니 잡는 유지문(油指紋)
기름 유출 뺑소니 사건 해결은 '유지문(油指紋·Oil Fingerprinting)' 기법이 필수. 수천 종의 화합물로 구성된 기름은 원유(原油) 산지와 생성 조건에 따라 구성 성분이 다르다. 사람에게 서로 다른 무늬 지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똑같이 정유된 기름도 연료 탱크에 남았던 기름과 섞이거나 다른 조건에서 연소하면 새로운 유지문이 생겨난다.
해경에 따르면 지난 4월 부산 사하구 감천항 주변 '기름 뺑소니' 사건 범인도 유지문 기법으로 밝혀냈다. 감천항 주변에 기름이 섞인 혼합물이 떠다녀 부산해양경찰서에서 방제 작업을 했지만,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차례 더 기름이 유출됐다. 출처를 모르는 기름 7000L가 바다에 떠다녔다.
우선 떠다니는 기름, 유출유(流出油)를 채취해 분석했다. 기름이 지닌 탄화수소 등을 분리해 분석하면 '크로마토그램' 차트를 그릴 수 있다. 여러 개 막대그래프가 나타나는데 이게 지문 무늬 역할을 하고, 이 형태를 비교해 '매우 유사, 유사, 상이, 판명불가' 4가지로 판단한다. 남해지방해양경찰청 오염방제과에서 유출유 3점을 분석했더니 모두 '유사'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모두 같은 배에서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 다음으로 혐의유(嫌疑油), 해상 오염 사고 발생 추정 시간에 사고 해역 인근을 지났던 선박의 기름을 분석했다. 감천항에 정박했던 선박 20척에서 연료유와 선저폐수 56점을 채취해 비교했다.
유력한 용의 선박은 1000t급 어선 E호. 이 배 연료유와 유출유가 비슷한 유지문을 보였다. 어선 E호의 연료 탱크에 남은 기름, 선저폐수와 선박 안 다른 용도 탱크까지 모두 확인했더니 선박 평형수(水) 탱크에서 채취한 시료에서 같은 유지문이 나왔다〈그래픽 참조〉. 40년 넘은 어선 E호는 선박 배의 균형을 맞추는 평형수 탱크에 물 대신 연료유를 채웠던 적이 있었는데, 최근 바뀐 러시아인 선원이 이 사실을 모르고 평형수를 배출하면서 기름 섞인 유성혼합물이 흘러나간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007년 충남 태안군에서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오염 사고 때도 유지문 기법이 적용됐다. 당시 기름 유출 선박은 명확했지만 피해 범위가 문제였다. 사고 당시 흘러나온 기름 약 1254만L가 해류를 타고 충남, 전라도를 지나 제주도 연안까지 확산했다. 유지문 분석으로 이 지역 양식장의 오염원이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출 기름이라는 것을 규명했다.
유지문 분석은 동해·서해·남해·중부지방해양경찰청 해양오염방제과와 해양경찰연구센터 감식분석팀이 맡는다. 지방해경에는 2명씩, 연구센터에는 4명 분석요원이 있는데 한 해 평균 유지문 2200여 점을 분석한다. 연구센터 감식분석팀 송인철 주무관은 12년 차 베테랑으로 대학에서는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다른 분석요원들도 대부분 화학, 화학공학 전공자. 송 주무관은 "1시간이면 유지문 크로마토그램을 분석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미국, EU, 일본도 같은 기법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남해지방해양경찰청 박선희 주무관은 "유출된 이후 파도나 바람 때문에 변질한 기름이더라도 유지문 분석으로 용의 대상을 좁힐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계도 있다. 유지문 분석으로 용의 선박을 특정할 수는 있지만 아직은 수사 참고자료로만 쓰인다. 선저폐수 415L를 불법 배출한 혐의(해양환경관리법 위반)로 지난달 적발된 러시아 선박 N호(796t, 어획물 운반선)는 '매우 유사' 결과 나왔지만 혐의를 계속 부인했다. 25일간 6차례 조사해 배에서 바다로 폐수를 내보내는 파이프라인을 발견한 뒤에야 혐의를 인정했다.
해양 오염 사고, 해난보다 부주의가 많아
해경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발생한 해양 오염 사고는 총 785건(유출량 약 97만1000ℓ). '해난'으로 인한 유출(약 58만1000ℓ)이 가장 많지만 사고 건수로는 '부주의'(353건) 가 가장 많다. '고의'(56건) 오염 사고도 7%나 된다. 해경 관계자는 "오염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엷은 무지갯빛이나 은빛 기름 막이 그리 넓지 않게 퍼져 있다"며 "이렇게 유출 규모가 적은 경우는 대부분 고의로 버린 기름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