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여성과 이를 거든 의료인을 형사처벌하도록 한 형법 조항(형법 269조 1항, 270조 1항)의 위헌 여부를 다시 판단하기 위해 헌법재판소가 6년 만에 공개변론을 열었다. 처벌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주장과 태아의 생명권 보호를 위해 처벌조항을 그대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앞서 2012년 헌재는 낙태죄의 위헌 여부에 대한 첫 번째 판단을 앞두고도 공개변론을 진행했지만 당시 헌재 결정은 재판관 4대4의견으로 합헌이었다.
헌법재판소는 24일 오후 2시부터 헌재 대심판정에서 형법상 낙태죄 등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은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270조 제1항(동의낙태죄)은 '의사 등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다.
헌법소원을 낸 사람은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다. 그는 2013년 11월~2015년 7월 임신부의 부탁을 받거나 동의를 구해 69차례 낙태수술을 해준 혐의로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법원에 처벌 근거가 된 형법 조항이 위헌인지 따져달라며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작년 2월 직접 헌재에 헌법소원을 냈다.
◇ "임신부의 기본권 침해" vs. "태아의 생명권 위협"
정씨 측 대리인은 "낙태에 대한 형사처벌은 여성이 임신·출산을 할 것인지 여부와 그 시기 등을 결정할 자유를 제한해 여성의 자기운명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임신 24주일 이내인 경우 모자보건법이 부모의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범죄에 의한 임신일 경우 등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상 전면 금지에 가깝다"면서 "국제인권조약기구,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이 지속적으로 낙태를 범죄로 삼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 측은 “임신의 유지와 출산을 강제하는 것은 임신 초기 안전한 임신중절 수술을 제한해 임부의 건강권을 침해하며, 임신에 관해 여성에게만 형사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불평등하다”고 했다. 또 “형사처벌이 사라지면 낙태가 만연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지만, 이는 사회·경제적 사유로는 낙태가 허용되지 않은 뉴질랜드(낙태율 18.2%)와 그렇지 않은 오스트리아(1.4%), 독일(6.1%)에서 보듯 막연한 추측이다”고 했다.
반면 낙태죄 합법을 주장하는 법무부 측은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헌법상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보호는 당연하고, 형사처벌 폐지는 보호조치를 없애는 것으로서 또 다른 위헌적 사태를 부른다“며 “원칙적으로 처벌하되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한국 법체계가 다른 나라에 비춰 특별할 것 없다”고 했다.
‘형사처벌이 낙태율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통계상 2005년 29.8% 수준이던 낙태율은 2010년 18.0%로 줄었다”면서 “형사처벌을 폐지할 경우 과연 지금 수준이 유지될지 쉽게 추산하기 어렵다”고 했다.
법무부는 다만 “낙태를 어느 범위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입법으로 풀어야 할 영역”이라면서 “그 범위는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성교육, 여권(女權)의 신장 등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고 했다.
◇ 2012년 결론 바뀔까
헌재는 같은 쟁점이 다뤄진 2012년 헌법소원 사건에서 위헌 정족수인 6명을 채우지 못하고 4(합헌)대4(위헌)로 팽팽하게 맞선 끝에 합헌 결정했다.
당시 헌재는 “낙태죄에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된다면 현재보다도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며 “경미한 벌금형으로 처벌한다면 낙태 시술이나 약품 등을 남용하는 영리 행위를 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징역형으로만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은 헌법상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이강국·이동흡·목영준·송두환 재판관은 “낙태죄 조항은 거의 사문화돼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은 달성하기 어려운 반면 임부의 자기결정권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면서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다”고 반대의견을 냈었다. 이동흡 재판관은 “낙태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한 뒤 결정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안전한 낙태시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입법조치가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6년 전과 재판관 구성이 완전히 달라진 만큼 이번에는 위헌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진성 헌재소장 등 재판관 6명은 인사청문회 등에서 낙태죄를 손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 또 여성가족부는 지난 3월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며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현행법은 여성의 생명권과 건강권, 재생산권 등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취지의 공식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헌재는 이날 공개변론 내용을 토대로 추가 검토를 마친 뒤 따로 선고기일을 잡고 위헌 여부를 가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