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사투리 억양으로 납치극을 흉내 내며 돈을 요구하던 '보이스피싱(전화 금융 사기) 시대'는 지났다. 공공기관 직원 사칭은 물론 시중 금융기관과 거의 흡사한 대출 상담으로 돈을 갈취하는 지능형 보이스피싱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은 23일 실제 보이스피싱 전화 녹음 파일을 유형별로 분석해 공개했다.
범인들은 전문적인 금융 용어로 피해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저축은행 이△△ 송금팀장입니다. 조금 편법을 써서 신용 등급을 올려 드리고 대출해 드리겠습니다. 저도 실적 올리고…." 경찰은 "신용 등급을 올려 저금리 대출을 해준다는 것은 100% 사기"라고 말했다. 단기간에 신용 등급을 올리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전화로 대출 가능한 제2금융권도 본인이 대부 계약서를 직접 작성해야 한다. 제2금융권 관계자는 "다른 명의 계좌로 송금을 유도하는 것은 무조건 보이스피싱"이라고 말했다.
'본인 확인 절차'를 하겠다며 정체불명의 애플리캐이션(앱)을 설치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 앱을 통해 피해자의 통화 내역이나 다른 개인 정보를 탈취한다. 경찰은 "보이스피싱 조직은 불법 앱으로 피해자가 은행에 대출 상담한 사실을 파악한다. 그 후 더 저렴한 금리로 대출해주겠다고 유혹한다"고 했다.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는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작년 12월에는 은행 지점장과 경찰이라며 역할극을 벌인 사기단이 붙잡혔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귀하의 대리인이라고 한 사람이 예금을 인출해 달아났다. 경찰에 신고할 테니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이어 경찰을 사칭한 다른 조직원은 "추가 인출 피해가 우려되니 금감원에 계좌 보호 조치를 요청해야 한다. 금감원 '안전 계좌'로 돈을 넣으라"고 속였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총 1만1196건의 보이스피싱 범죄가 적발됐다. 이 중 금융기관을 사칭한 '대출 빙자' 사기가 81%(9066건)를 차지했다. 전년도 같은 기간 5523건(피해액 443억원)의 배가 넘는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대출 금리가 오르고 경기가 악화되면서 서민들이 보이스피싱에 쉽게 넘어간다"며 "워낙 그럴싸하게 말하기 때문에 전문직 종사자들도 깜빡 속는다"고 했다.
검찰·금감원 등 권력기관이라고 속이는 경우도 많다. 지난 3월 직장인 A(여·30)씨는 "서울중앙지검 ○○○ 검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다. A씨는 "검사라는 말에 기가 눌려 제대로 확인해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사기범은 "귀하의 통장이 범죄 대포 통장으로 이용되었다. 계좌를 안전하게 복구해 줄 테니 돈을 국가 안전 보안 계좌로 입금해 보관하라"고 했다. A씨가 1억원을 입금하자마자 잠적했다.
검찰 등이 피해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범죄 사실을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서면이나 전화로 출석 요구를 먼저 한다. 박찬우 경찰청 경제범죄수사계장은 "더구나 수사 기관이 송금 요구를 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고 했다. 정부 기관 사칭 사기범들의 말을 분석해 보니, '서울중앙지검'이나 '첨단범죄수사부' '귀하 명의의 통장 발견' '자산 보호 조치' 같은 문구를 많이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1~4월 '공공기관 사칭형' 보이스피싱은 총 1649건(피해액 276억원) 발생했지만, 올해 같은 기간엔 2130건(피해액 403억원)으로 30% 가까이 증가했다. 전화한 사람의 소속과 직함을 알아두고 해당 기관의 공식 대표 번호로 전화해 확인해보는 것도 보이스피싱에 당하지 않는 요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