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생명과학부 학생회의 소셜미디어에서는 지난 2일부터 5일간 치열한 공모전이 열렸다. 오는 15일 스승의 날에 내걸 현수막의 감사 문구를 모집한 것이다. 공모가 시작되자마자 재치있는 응모작이 쏟아졌다. '교수님 수업에 반응하는 반응분자(substrate)가 되겠습니다' '33명의 교수님께 배우는 우리는 다전자원자(multivalency)' 등 전공 용어를 살린 문구가 많았다. 지난해 당선작은 '교수님의 가르침은 저희를 꽃피우려는 플로리겐(florigen·식물의 꽃눈을 형성하는 물질)입니다'였다. 고려대 생명과학부 학생회장 최한길(20)씨는 "학생들과 교수들 모두 반응이 좋아 올해도 공모전을 시행하게 됐다"며 "제작 비용도 저렴하고, 개인적 선물과 달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방식인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대학가에서 스승의 날 내거는 '감사 현수막'이 늘고 있다. 감사 현수막은 지난해부터 눈에 띄게 늘었다. 2016년 9월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도입된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교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물론 카네이션 전달도 조심스러워지면서 현수막이 대안이 된 것이다. 현수막 제작비는 개당 5만원 정도로 저렴하다. 학과별로 개성이 담긴 감사 문구를 담을 수 있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재밌다는 반응이 많다. 청탁금지법에서는 학생 평가를 담당하는 교수는 제자와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선물을 주고받으면 액수와 상관없이 법 위반이다. 카네이션 역시 학생 대표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주는 것만 허용된다는 것이 국민권익위원회의 해석이다.
연세대와 서강대의 일부 학과 학생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현수막 문구를 공모했다. 서강대 사회과학부는 학생회의를 통해 올해 문구를 '스승의 날 감사의 말씀드립니다'로 결정했다. 서강대 사회과학부 회장 임영수(21)씨는 "청탁금지법 때문에 문제가 될까 싶어 올해 스승의 날에도 현수막만 걸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해 하트 모양의 고혈압 약제인 비소프롤롤을 그려넣어 인기를 끈 이화여대 약학부는 교수들을 위한 깜짝 선물처럼 올해 문구를 극비리에 붙이고 현수막 제작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현수막을 달기도 한다. 졸업생의 선물은 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지만, 가능한 한 조심하면서 마음을 전달하겠다는 취지다. 지난해 포항공과대학교 재학생들이 창원과학고에 내건 현수막은 내내 화제가 됐다. 유명한 만화 캐릭터인 곰돌이 푸 그림을 그려넣고 '창곽(창원과학고의 줄임말) 선생님들 보고시푸우' '이러려고 졸업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 등의 문구를 담아 재치 넘친다는 반응이었다.
법률 전문가들은 '감사 현수막'은 김영란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본다. 서울변호사협회 공보이사 전우정 변호사는 "현수막은 직접적으로 물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공개된 장소에서 대표성이 있는 집단의 이름으로 내용이 전달된다"며 "교수에게 경제적 이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청탁금지법에 저촉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한 변호사는 "청탁금지법의 취지가 사욕을 위해 개인 간의 금품 거래를 막는 것인 만큼 감사 현수막은 학생들이 낸 좋은 대안 같다"고 했다.
교수와 학생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김영란법 도입 후 스승의 날은 교수들 사이에선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날이 됐는데, 교정 곳곳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학생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대학생 장민철(24·연세대)씨는 "재밌고 이색적인 문구를 보면 교수들뿐 아니라 학생들도 즐겁다"며 "다 함께 문구를 고민하고, 전달하는 과정이 뜻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