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에서 태우는 건 비닐하우스"
이창동 "희망 없는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싶어… 배우들에게 원하는 건 그 인물로 살아가는 것"
유아인 "영화의 윤리? 미스터리한 게 더 윤리적"
이창동 감독의 8년만의 작품 ‘버닝'이 제 7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가운데 5월 4일 출국 전 기자회견이 열렸다. 강렬한 티저를 제외하고 영화의 전체 스토리는 언론에 공개된 바 없다. ‘버닝'언론 시사회는 오는 5월 14일로 잡혀있지만,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5월 16일 오후 6시(현지시각) 칸 뤼미에르 대극장 최초 공개)로 인해 국내에는 17일 오전 6시까지 엠바고가 걸려있는 상황.
따라서 칸 출국 전 기자 회견은 어둠 속의 심연을 헤매듯, 감독과 배우들과 기자들이 안개 속에서 미스터리한 퍼즐을 함께 맞춰가는 분위기였다.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은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하겠다'는 자세였고, 실제로 스무 고개처럼 몇 개의 고개를 넘어가자 무언가 갈피를 잡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창동 감독은 8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회고했다. 그는 "8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 시간이고 어떤 영화로 관객을 만나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고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나도 자식이 있고 예전에 학교 있을 때 내 앞의 학생들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고민했다. '버닝'이 그 결과물이다."
이창동은 요즘 청년들이 아주 미스터리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논평했다. 그에 의하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이창동은 한국 뿐 아니라 지금 전 세계의 청년들은 부모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들어지는 최초의 세대라는 생각이든다고 했다. “세상은 앞으로 더 나갔지만 이제 더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가 한숨을 쉬듯 말을 이어갔다.
“요즘 젊은이는 무력감이나 분노에 차있을 것 같다. 그들이 이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의 수수께끼같지 않을까… 과거에는 힘들어지는 이유가 분명했다면 지금은 무엇때문에 희망이 없는지 대상조차 불분명하다.” 우리가 ‘버닝'이라는 영화에서 그런 젊은이의 심리 상태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다.
영화 '버닝'은 벤, 종수, 해미라는 세 젊은이 사이의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렸다. 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이지만, 하루키 또한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Barn burning'에서 이야기의 모티브를 따왔다. 원작의 의미를 살리고 싶어 제목도 '버닝'을 그대로 썼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로, '뭔가를 불태우고 싶은' 심리를 표현했다.
이창동은 8년 만에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변화했다고 했다. 전작인 ‘밀양' ‘시' 등에서 그는 소시민들의 일상의 사악함을 각성시키는 윤리적 화두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윤리적 화두'를 던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윤리라는 건 따지자면 어려운 층위를 갖고 있다. 윤리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분명 주인공의 선택은 있다, 그게 윤리적일지 아닐지 모르겠다.” 이번 영화는 ‘윤리적 명제'보다 젊은이의 감각과 정서로 그들과 소통하려 했다는 것.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칸 영화제 첫 레드카펫 진출로 약간 상기돼 보였으나, 영화 전체를 책임지는 맏형답게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최근 공개된 1분 남짓의 예고편에서 유아인은 쓸쓸하고 처연한 종수의 얼굴로 나타나 보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품의 수상만큼이나 배우의 수상도 관심사다. 지난해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의 호아킨 피닉스였다.
-수상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를 갖고 있나?
“(유아인)부담스럽다. 칸 영화제에 가는 건 개인사가 아니라 ‘버닝'을 알리러 가는 자리라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연기 스타일은 감독님의 요구대로 관성에서 벗어나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예전엔 어느 정도 강박이 있었다.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표정들, 잘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순간을 전달하기 위해서 너무 외향적으로 치우치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는 사실에 가깝게 그래서 오히려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주게 과제였다.”
‘밀양' ‘시' 등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계몽주의적인 면과 문학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배우들은 마치 소설가의 문장처럼 육체적으로 진실하게 연기에 임하곤 했다. 이창동 감독과 작업한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등의 배우는 완전히 새로운 연기 지평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곤 했다. 극한의 고통을 통과해서 나온 놀라운 표현력에 배우들은 이창동에게 ‘변태 감독'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극한의 창조자’라는 의미로 ‘변태 감독’이라는 호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창동)변태 감독이라고 말을 하지만(웃음)… 내 연기론은 단순하다. 억지로 뭘 만들어서 표현하지 말고 그 감정과 상황에 맞게 살아가기를 요구할 뿐이다. 사실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끄집어낸다는 건 내 연기론과는 반대된다. 나는 목표를 가지고 몰아부치지는 않는다. 스스로 가져가기를 바랄 뿐. 하지만 종종 그 인물이 주어진 상황이 어려울 경우 배우가 도달하기 힘들어할 때는 있기는 하다. ‘버닝’은 전작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극한 감정이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부치진 않았다.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미묘하다.”
이창동은 배우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 했고, 배우들이 더 자유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했다. “내가 통제하고 지배하기보다 자유롭게 놓아두고 싶었다. 같이 참여한 배우나 스태프들, 심지어 이제까지 절제해왔던 음악까지... 각각의 자기 존재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하는 식으로 참여하길 바랬다.”
감독과 배우의 말을 종합해보면, 영화 ‘버닝'은 어마어마한 어두운 에너지가 역동하는 청춘 심리스릴러다. 이창동은 별 것 아닌 일에도 강한 텐션을 느끼고 사는 젊은이들을 관찰한 후 일상의 스릴러로 각색해냈다. 원작에서는 헛간을 태우지만, 영화에서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소설에서는 헛간을 태운다는 행위가 실제인가, 메타포인가, 그 의문을 따라간다. 나는 메타포라는 문학적인 의미보다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이미지화 되는가를 가장 고민했다. 비닐하우스가 영화적 이미지다. 들여다보면 투명해보이는데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그게 영화 매체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들을수록 더욱 알송달송해지는 이창동의 말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은 유아인인듯 했다.
-이 영화는 젊은이의 무력감과 분노에 관한 심리 스릴러라고 했다. 스스로 ‘대담한’ 청춘의 아이콘으로 살아온 유아인이라는 젊은이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나?
“청소년들이 많이 봐야한다.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새로운 영화다. 영화의 윤리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선과 악, 명과 암, 꿈과 희망… 이제까지 영화가 수도없이 전하고 보는 우리는 매료됐던 분명한 세상, 그런데 실제 세상은 그렇게 꿈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명확성보다 미스터리한 게 더욱 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말은 어렵게 했지만 영화는 아주 쉽다"며 흥행에 대해서도 기대를 전했다. “‘어벤저스’ 강풍이 끝나고 ‘버닝’을 봤으면 한다. 방화, 살인 등으로 청불등급을 받았는데 그만큼 자극적이지 않다(웃음).”
이창동은 ‘오아시스(2002년)'로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밀양(2007년)'으로 전도연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노배우 윤정희와 함께 했던 ‘시'는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수수께끼 같은 영화 ‘버닝'은 5월 17일 개봉한다. ‘곡성’, ‘마더’ 등을 촬영한 홍경표 촬영 감독이 합류해 CG없이 최대한 사실적인 촬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