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이달 말 대선을 앞두고 최저임금을 잇달아 인상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난달 30일 최저임금을 종전의 155% 수준인 100만볼리바르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베네수엘라의 최저임금 인상은 올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다. 1년 전과 비교해보면 5.6배 오른 수준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를 배려하기 위해 최저 임금을 올리기로 했다”며 “경제 전쟁에 직면한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문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만성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어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더라도 실생활에서 체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새 최저임금 기준인 100만볼리바르는 실효 환율을 감안하면 1.61달러(약 1730원)에 불과하다. 이미 화폐 경제가 무너져 물물교환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사실상 대선을 겨냥한 선심성 대책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한 때 고유가 경제로 특수를 누리던 베네수엘라 경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2018년 2월 4일 수도 카라카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대선 앞두고 공공기관 직원엔 특별 보너스

베네수엘라의 추락은 원유 수출만 믿고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한 게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달 최저임금을 올릴 때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에겐 150만볼리바르의 특별 보너스 지급도 약속했다. 재정 적자가 심해지는 데도 별다른 이유 없이 또다시 선심성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수십년 전부터 공공부문 종사자 숫자를 늘리는 한편, 정권 유지를 위해 이들을 위한 포퓰리즘 지원책을 발표해왔다.

원유로 벌어들인 외화를 원유 채굴 등 설비·기술 투자에 쓰지 않고 포퓰리즘 대책으로 탕진해오다 보니 최근엔 주수입원인 원유 생산량마저 줄어들고 있다. 지난 4월 베네수엘라의 월간 원유 생산량은 150만배럴로, 전년동기대비 30~40% 감소했다.

베네수엘라의 흥망성쇠는 국제 유가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의 96%, 재정 수입의 50%, GDP(국내총생산)의 30%가량을 석유에 의존한다. 유가가 높으면 벌어들이는 외화 수입이 많지만, 유가가 떨어지면 외화 수입이 적어진다. 수 개월전부턴 생필품조차 수입할 수 없을 정도로 화폐 경제가 무너져 살인적인 물가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물가 지표다. 베네수엘라 의회에 따르면, 지난 3월 말까지 12개월동안 베네수엘라의 물가 상승률은 8878%에 달했다. 지난 3월 한 달 동안의 물가는 전월대비 67% 오른 것으로 집계됐고, 1분기(1~3월)의 전분기 대비 상승률은 453%에 달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2017년 경제 성장률은 -14%였다. 올해도 성장률이 -1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돼,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되고 있다. 마두로 취임 후 GDP 규모가 반 토막이 나게 되는 셈이다.

◇ 주수입원인 원유 생산량 마저 급감

유가 하락으로 외화 감소 수익에 따른 후유증은 베네수엘라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후폭풍은 화폐 경제가 무너져 버려 식료품·의료품 등 생필품을 구하기조차 어려워진 점이다. 호주의 온라인 학술매체인 ‘컨버세이션’은 경제 파탄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아동 54%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민들은 기아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미국 등으로 망명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베네수엘라 중앙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내 가구 구성원 75%는 평균 체중이 1년전보다 8.62kg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미 부채 위기는 기정사실화 되는 모습이다. 이미 1300만달러 규모의 대외부채는 지급 불능 직전이고, 최근엔 이웃 나라 브라질 국영은행엔 2억7400만달러 규모 채무를 갚지 못해 결국 부도 처리됐다. 지난해 베네수엘라는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로부터 각각 전면적 국가 디폴트의 바로 전 단계인 ‘선택적 디폴트(SD·Selective Default)’와 ‘제한적 디폴트(RD·Restricted Default)’ 신용등급을 받은 바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외화벌이에 나서려 원유 매장량을 기반으로 한 가상화폐 발행에까지 나섰으나 국제 사회의 제재로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최근 해외 제약업체에 체납된 약품대금을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과 광물로 지불하겠다는 제안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 여야 막론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역점

가장 절망스러운 점은 정치권이 포퓰리즘 정책을 거두고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군중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두로 정권은 최저임금 인상에 이어, 미국 등 외국계 자본을 겨냥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잇달아 인상하자, 야당 측은 아예 ‘최저임금 75달러’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일부 야당 인사들은 베네수엘라 화폐 대신 달러화 사용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현 상황에서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 금지 제재를 검토하는 점도 베네수엘라 경제의 주요 변수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이 세 번째로 석유를 많이 수입하는 국가다.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산 석유 수입을 제한하면 베네수엘라 경제는 추가로 타격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