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장미’는 찔레꽃의 별칭이다. 꽃말은 ‘고독’이지만 찔레꽃은 볕이 드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란다. 갖은 구박을 견뎌내고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활짝 핀 들장미 소녀 캔디와 닮았다.

어렸을 때 만화영화 '빨간 머리 앤'이 방송되는 동안 무심코 채널을 돌렸다가 어머니에게 세차게 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 어른이 '빨간 머리 앤'을 볼 거라고 생각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한창 열중해서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나와 앤이 척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주근깨, 빨간 머리에 빼빼 말랐다며 자신을 수없이 비하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던 앤이, 주근깨 말라깽이 빨간 머리 시절은 불과 2~3년에 그친 채 제2차 성징기가 지나자 모두가 감탄하는 처녀로 환골탈태하는 것이 싫었다. 빨간 머리는 금갈색이 되고 주근깨는 사라졌으며 빼빼 마른 몸매는 일찍 몸이 푹 퍼진 친구 다이애나가 부러워하는 호리호리하고 날씬한 몸이 된다. '고작 인생의 몇 년을 그렇게 보낸 주제에 뚱뚱이들의 괴로운 삶을 네가 알아?' 하며 나는 도저히 앤과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앤이 없어도 내 소녀 시절을 함께 보내 줄 친구가 있었으니, 그녀는 '들장미 소녀 캔디'의 '캔디스 화이트'다.

갓난아기 때 고아원에 버려진 캔디는 너무나 흰 피부 때문에 '화이트(white)'라는 성을 갖게 됐지만 자라면서 주근깨가 온 얼굴을 뒤덮어 화이트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형편이 어려운 고아원 '포니의 집'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동안 친구 애니를 비롯해 많은 아이가 좋은 가정으로 입양됐지만 점점 나이 먹어가는 캔디를 바라는 가정은 없었다. 열두 살이 될 무렵 캔디를 원하는 '라건'가(家)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자식으로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버릇없는 '닐'과 '이라이저' 남매의 놀이 상대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가정교사를 몇십 번 갈아치운 이 남매와 캔디가 잘 지낼 리 없었고 라건가 사람들은 크면 하녀로 써먹겠다며 캔디에게 유엔(UN)이 알았다간 큰일 날 수준의 아동 노동을 시킨다. 라건가는 아드레이가(家)라는 명문가의 방계 집안인데 아드레이가에도 또래 소년들이 있다. 장미를 가꾸기 좋아하는 아름다운 '안소니', 멋쟁이 '아치', 발명왕 '아리스테아'가 이들이다. 이라이저는 안소니를 좋아하지만 이 소년들은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캔디에게 마음을 빼앗겨 저마다 열을 올린다. 캔디를 괴롭히려고 혈안이 된 이라이저는 허름한 차림의 캔디를 억지로 파티에 데려가는데, 세 소년과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캔디를 본 라건가 사람들은 캔디를 방에서 쫓아내 마구간에서 살며 말을 돌보도록 시킨다. 오랫동안 '들장미 소녀 캔디'를 애독했던 내가 캔디를 새롭게 보게 된 장면이다. 두어 해 전 직장을 찾아 헤매다가 말 농장에서 일하게 된 다음이었다. 이 만화를 그냥 볼 때는 말을 돌본다는 게 그렇게 힘든 육체노동인 줄 몰랐다. 드라마 여주인공들에게 툭하면 '캔디'라는 말을 남발할 계제가 아니었다.

캔디처럼 나도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캔디는 마사(馬舍)에 살고 있으니 출퇴근 시간은 없지만 말의 똥오줌에 파리가 들끓을 테니 절대 안락한 잠자리는 아니다. 마방(馬房)마다 말들이 간밤에 싸 놓은 말똥을 치운다. 말똥을 주워내고 나면 말의 침대인 깔짚을 치워야 하는데, 싸 놓은 오줌으로 범벅이 돼 육중한 데다 냄새가 지독하다. 더 써도 되는 깔짚을 마방 안에 고르게 펼쳐 주고 웬만한 초등학생 키만 한 새 깔짚 자루를 질질 끌어온다. 이것을 '베딩(bedding)'이라고 하는데 성인 남성도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이라이저와 닐이 각각 '서러브레드' 종(種) 말을 한 마리씩 가지고 있으니 캔디는 500㎏ 정도 나가는 말들의 시중을 매일 든 것이다. 뼈가 빠지는 노동이다. 도저히 열두 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마구간 일을 하고 나면 캔디는 예비 하녀로 부엌 일과 청소까지 해야 한다.

미모가 뛰어나지 않고 고아인 캔디를 등장하는 남자마다 모조리 좋아하게 되는 것은 캔디의 씩씩하고 밝은 성격 덕분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전투적으로 주어진 일을 해내며 자립적 여성으로 성장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캔디를 다시 생각했다. 아드레이가의 양녀로 입양돼 얼마든지 놀고먹는 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안소니의 죽음 후 캔디는 포니의 집으로 돌아가 고아원 일을 도우며 지낸다. 사립학교에서 만난 '테리우스'를 사랑하게 되지만, 둘은 야밤에 만났다는 오해를 받고 퇴학 위기에 이른다. 그때도 캔디는 얌전히 사립학교 여학생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간호학교를 다니고 간호사로 당당히 혼자 선다. 테리우스가 브로드웨이의 총아가 됐지만 캔디는 전혀 그런 쪽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간호사로 활약한다. 어릴 적 알게 된 '앨버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을 알고는 자기 아파트에서 치료하며 돌봐 주는데, 혼전 남녀가 동거한다고 주변 사람 입에 오르내려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문란한 여성으로 지탄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캔디는 흔들리지 않는다.

사립학교 친구 '패트리샤'는 아리스테아의 연인이 되는데, 아리스테아는 패티의 고국인 프랑스를 지키고 싶다며 자원입대해 버린다. 공군 조종사로 활약하던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열린 장례식에서 패티는 과도로 자살하려고 한다. 모두 그녀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종기처럼 대하며 겁에 질려 있는데, 캔디만이 제정신을 유지하며 아리스테아가 그걸 좋아할 것 같다면 당장 죽으라고 쏘아붙이고 나서 달래 준다. 패티는 덕분에 실컷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캔디를 좋아한 이유는 빨간 머리 앤처럼 어른이 되자 주근깨가 싹 없어지며 날씬한 미인으로 변신―글쎄 이런 건 약간 비겁하달까―같은 것을 하지 않고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신경 쓰이는 주근깨와 납작코를 갖고 있지만 얼마든지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결말에서도 캔디는 누구의 여자도 되지 않는다. 누구와 이뤄질지 도대체 짐작도 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택한 직업인 간호사 제복을 입고 활짝 웃는 캔디의 모습으로 만화가 끝난다. '순정 만화'이긴 하지만 누구와도 로맨틱한 해피엔딩이 아닌 채 끝나는 '순정 만화'로서는 좀 시들한 결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호사 제복을 입고 당당히 웃는 캔디를 보면 그런 것은 아무렇지 않다. 이렇게 혼자라도 얼마든지 괜찮은 순정 만화 주인공을 만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순정 만화 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 품에 안긴 채 끝을 맞는 것이 당연한 공식이지만 이 공식을 깨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립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오랜 시간 캔디는 여러 소녀에게 용기를 줬을 것이다. 누구와 이루어지든, 캔디는 캔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