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매매 의혹 동영상을 빌미로 돈을 뜯어낸 일당의 재판이 마무리됐다. 2016년 7월 이 동영상이 공개된 지 1년 9개월 만이다.

이 사건은 이 회장의 충격적인 모습 이면에 대기업의 조직적 개입 여부와 삼성이 이들에게 준 돈의 출처, 성매매 장소의 소유주, 대기업의 조직적 개입 등 여러 의혹을 불렀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밝혀진 것은 누군가 계획적으로 이 영상을 촬영했고, 이를 빌미로 삼성을 협박해 돈을 받아냈다는 것 뿐이다.

◇'볼펜 카메라' 등 치밀한 준비…2년간 5차례 촬영
2011년 말 중국 국적의 여성 김모(31)씨가 친하게 지내던 이모(39)씨와 함께 TV를 보다가 "어. 나 저 사람 집에 가 봤는데..." 라며 TV 화면 속 이 회장을 가리켰다. 이씨는 깜짝 놀라 "진짜냐. 거짓말 마라"며 "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한국 실정에 어두웠던 김씨는 "그냥 돈 많은 부자인 줄만 알았다"며 성매매를 하기 위해 이 회장 집에 갔던 일을 털어놨다.

믿기지 않았던 이씨는 “사실이라면 사진이라도 찍어와 보라”고 했고, 그해 12월 김씨는 진짜로 이 회장 모습이 담긴 짤막한 동영상을 찍어왔다. 이들 범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씨는 곧장 선배처럼 지내던 선모(47)씨에게 이 회장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줬다. 두 사람은 대기업에 다니던 선씨의 형(57)에게 “성매매 동영상이 있다”고 알렸다. 직접 동영상을 확인한 형 선씨는 “앞으로 이거 더 찍을 수 있겠냐”며 “더 찍을 수 있으면 나한테 하나 주고 삼성과 쇼부(결판 내기 위해 흥정하겠다는 일본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선씨와 이씨는 구체적인 범행 계획을 세웠다. 선씨는 “촬영 장비도 사야 하는데 경비가 없다”며 형에게 신용카드와 차량도 받았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볼펜 형태의 카메라도 샀다. 이들의 부탁을 받은 김씨는 2012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성매매 여성들을 시켜 이 회장의 모습을 몰래카메라에 담았다.

동영상에는 젊은 여성 3~5명이 이 회장과 대화하는 모습, 이 회장의 목소리 등이 또렷하게 담겼다. 이 회장이 1명당 수백만원씩 돈을 주는 모습도 있었다. 이런 장면은 2016년 7월 인터넷 매체인 뉴스타파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 회장이 병원에 있을 때였다.

선씨 일당은 삼성 측과 이메일 연락을 주고받은 뒤 서울 강남에 있는 호텔 사우나와 커피숍에서 삼성 직원을 만나 돈을 요구했다. 2013년 6월 14일부터 21일 사이 총 6억원이 입금됐다.

◇비서에게 USB보내 협박… 두 차례 총 9억원 뜯어내
동영상을 손에 쥔 선씨 일당은 CJ그룹에 다니던 형에게 삼성그룹의 조직도와 CJ그룹 출입기자 명단 등을 넘겨 받았다. 형 선씨는 협박 편지의 초안도 잡아줬다. 이들의 '돈 뜯어내기'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이 회장의 여비서 최모씨에게 접근했다. 최씨가 평소 단골로 다니는 강남의 한 미용실에 ‘동영상’이 담긴 USB를 보냈다. 또 삼성그룹 서초사옥 안내 데스크에도 찾아가 최씨에게 전해달라며 USB를 남겼다. USB와 함께 연락을 주고 받을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도 남겼다.

선씨 일당은 몇 차례 최씨 등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뒤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사우나와 커피숍에서 삼성 관계자들을 만났다. 돈을 요구했고, 2013년 6월 삼성 측으로부터 1주일 동안 총 6억원을 받아냈다.

두 달쯤 뒤 김모(40)씨와 심모(40)씨 등 또 다른 두 명이 끼어들었다. 선씨가 갖고 있던 동영상을 훔친 뒤 선씨 형의 도움으로 이들과는 별개로 삼성으로부터 3억원을 받아냈다. 검찰은 형 선씨를 포함해 이들 5명 모두를 공범으로 봤다.

검찰은 ‘이건희 성매매 동영상’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던 CJ그룹. 수사결과 개입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CJ에서도 1000만원 받아… K.H 보고서 의혹
검찰 수사는 동영상이 폭로되고 시민단체 등이 고발한 지 6개월여가 지난 작년 2월 본격화됐다. 범행을 전후해 당시 CJ그룹 본부의 차장급이던 선씨가 동생에게 수 차례에 걸쳐 수백만원씩을 송금한 내역, CJ그룹 임원 등과 이메일을 주고 받은 흔적 등이 나오면서부터다.

검찰은 이 사건의 배후로 CJ그룹을 의심했다. 선씨가 일하던 CJ제일제당 등을 압수수색했다. 동영상 촬영 당시 이맹희(2015년 작고) 전 제일비료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수천억원대 상속 재산 소송을 벌이던 시기였고, 2013년 이재현 CJ 회장의 비자금 수사 때 CJ 측에서 ‘K.H 관련 보고서’ 등의 문건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K.H는 이건희 회장의 영어 이니셜로, 문건의 내용은 성매매 동영상 관련 내용이었는데 당시만해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고 했다.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CJ 관계자가 2012년 4~5월 서울 모 대학교에서 선씨 일당을 만나 1000만원을 주고 동영상이 들어있는 USB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선씨 일당은 이재현 회장의 측근이자 CJ그룹 재무담당 임원에게 접근해 이 거래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이상한 점은 선씨 일당이 삼성에게 돈을 받아낸 것보다 1년이나 앞서 CJ 측과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선씨 일당 중 일부는 검찰 조사에서 “CJ 측으로부터 착수금을 받고 동영상 촬영을 했다”고 했다. 검찰은 이들이 “우리는 그쪽 회사하고 거래한 내역, 돈 받은 증거, 사진 녹음자료 다 있으니까 삼성에서는 어찌 받아들일지…”라며 CJ측을 협박한 이메일도 확보했다.

검찰은 CJ 측이 동영상 촬영에 개입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고, 거래한 시점과 돈을 준 사람 등을 제대로 특정하지 못한 채 선씨 등만 기소했다. 법원에서는 선씨 등이 CJ 측에서 받은 1000만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CJ 측은 줄곧 "동영상 촬영은 선씨 개인이 저지른 범죄일 뿐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CJ가 왜 거액을 주고 이 회장 동영상을 입수했는지, 선씨 일당으로부터 왜 협박을 당했는지 등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선씨 일당만 기소돼 중형 선고… 대기업은 다 빠져나가
2017년 4월 동영상을 찍어 돈을 뜯어낸 선씨 일당만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성매매처벌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 이건희 회장에 대해선 시한부 기소중지와 공소권없음 처분을 내렸다. 이 회장이 와병 중이라 조사가 힘들다는 게 이유다. 검찰은 이 회장과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유사성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이다.

성매매가 이뤄졌던 논현동 빌라 ‘차명재산’ 의혹과 관련해서는 김인 당시 삼성SDS 고문만 부동산실명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됐다. 이 역시 이 회장은 기소중지 등의 이유로 재판을 받지 않았다. 김 고문은 이 회장 대신 자신 명의로 논현동 빌라 전세 계약을 맺어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검찰은 또 선씨 일당이 삼성으로부터 뜯어낸 돈은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서 나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이 돈의 출처가 삼성이라면 횡령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지난 12일 선씨 일당의 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CJ 부장을 지낸 형 선씨에 대해 범행을 주도한 것으로 인정해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던 원심을 확정했다. 일당 중 가장 무거운 처벌이다. 선씨는 “동생 등이 부탁해 대기업 관계자들의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 등만 알려줬을 뿐”이라며 범행사실을 부인하면서 상고까지 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에서 돈을 뜯어낸 동생 선씨 등 4명은 원심에서 각각 징역 1년 6개월~3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상고를 포기해 앞서 형이 확정됐다. 동생 선씨는 징역 3년, 공범 이씨는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다만 이들의 부탁을 받고 동영상을 촬영한 조선족 여성 김씨의 경우 범행을 시인·반성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던 점 등이 고려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